“너희는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근심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근심하고, 근심꺼리 한두 가지는 가지고 살지요.
그러니 근심이란 어쩌면 인간의 조건이고
지질하고 모자라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치부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도 우리의 근심을 인정하는 투로
“너희는 근심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근심이 다 기쁨으로 바뀔까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근심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진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심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기쁨을 지향하지 않는 근심은 다 비생산적인 근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근심을 하되
애를 낳는 여인과 같은 생산적인 근심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이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겪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시련에 불과할 수도 있고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이 될 수 있듯이
고통을 겪되 고통이 그저 고통이 아니라
애를 낳기 위한 진통 또는 산통이 되게 하라는 것이고
영적으로 바꿔 말하면 하느님을 낳는 산통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제자가 아무도 없다고 약간 서운한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는 제자들과 달리
우리의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묻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고통을 겪는 순간 고통과만 마주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고,
고통에 함께 있어줄 존재를 찾되
하느님은 찾지 않고 사람만 찾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믿는 사람은 고통의 순간에
이 고통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하느님께 묻고,
나의 고통에 당신은 어디 계시냐고 묻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바로 기도인데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언젠가 등장하십니다.
나의 고통에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신 것 같고,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 어둠이 너무 짙고
그 어둔 밤이 너무 길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등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등장하는 때는 늘 새벽녘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어둔 밤을 지나지 않는 새벽이란 없습니다.
어둔 밤을 한 번도 거닌 적이 없습니까?
아니, 지금 어둔 밤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까?
그러면 지금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신은 어디 계시고, 나는 지금 어디만치 와 있냐고.
끝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헤매는 순간에,
모든 것은 다 지난간다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출구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두움의 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살아오면서 그 때 처럼 시간이 흐른다는 것에 감사한 적이 있었을까...요
행복도 불행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이 얼마나 천만다행한 일인지요.
하느님만이 영원하시다는 것,
그러니 고통의 순간일 수록 인생을 길게 보는 안목이 있어야하고 그래야 고통의 순간을
견디는 진정한 용기와 힘이 생긴다는 것이 제 작은 경험입니다.
"어둔 밤을 지나지 않는 새벽이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