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는데,
나는 어떻게 기도하는지, 저렇게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묵상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매일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바치실 것이니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 안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매일 수없이 바치지만 뜻도 없이 바친다면
다시 말해서 마음을 실어서 바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오늘 주님께서 하지 말라는 그 빈말, 빈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속뜻을 잘 알아야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선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것은
어머니로 만나지 말고 아버지로 만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우리 존재와 삶의 근본으로 만나라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인격적으로 만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근본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의 근본이시라고 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존재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됐을 뿐 아니라
마치 씨앗이나 유전자와 같이 우리의 정체성이 하느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씨앗이 비록 작지만 거기서 큰 나무도 시작되고
씨앗 안에 그 큰 나무의 모든 것이 들어있듯이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느님 안에 우리의 모든 게 들어있습니다.
내가 이런 모습이고 이런 성격을 가진 것도 다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땅 위에서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내 안에 유전자처럼 이미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내가 싫다면 이런 나의 원죄는 하느님께 있으며,
‘아버지 왜 나를 이렇게 낳으셨나요?’라고 하는 것이 기도이고
이런 나를 낳으신 하느님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기도이며
이런 나를 은총으로 만나는 것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런 관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우리는
이제 우리 서로의 관계가 좋은 관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면 우리는 정말 남이 아니고 형제입니다.
주님은 분명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게 하셨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기도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기에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이시만
나만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시기에 공동체적인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지 않고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해야 하고,
나만 하느님과 화해하고 나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화해하고 공동체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게 해달고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해를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용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형제와 화해해야 하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용서란 통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가 아니라 서로 남남이라면
나와 하느님 사이의 용서와 화해가 따로 이루어지고
나와 이웃 사이의 용서와 화해가 따로 이루어지겠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인 형제들이라면
하느님과 나 사이의 용서는 나와 형제 사이의 용서와 함께 이루어질 겁니다.
형제끼리 원수가 되어 따로 당신께 오는 것을 부모가 원치 않으시듯
하느님도 우리가 원수가 되어 따로 당신께 오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겁니다.
제단에 제물을 바치러 오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