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얘기들 중에는 우리가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은데
오늘 창세기의 얘기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또 말씀대로 복을 내리시기는 하시는데
그 복 주시는 시기나 방식이 우리의 기대와 영 다릅니다.
고생 고생하다가 늘그막에 가서야 복을 주십니다.
이왕에 주실 것 좀 더 일찍 자식을 주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아브라함이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고 의심치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나이 아흔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믿은 보람이 무엇입니까?
복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그렇게 충실히 믿었건만
백 살을 사는 동안 그 대부분의 세월을 불행하게 보내게 하시는
그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고 하느님의 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행하기까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고통스럽고 슬펐을 텐데
그 긴 기간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은 무슨 의미이고
그것이 어찌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백년이 고통스러워도 마지막만 행복하면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Happy ending이라도 잔인한 백 년입니다.
그리고 종 사갈에게는 금방 아이를 주시면서 사라에게는
그 모욕과 수치를 다 당하게 한 다음 주시는 것은 너무 잔인합니다.
저는 이것이 아직까지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같은 고통을 당하며 제게 호소하는 분들에게
마땅한 답을 드리지 못하고, 그저 고통을 조금 같이 나눌 뿐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현재까지의 저의 이해를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과거의 고통은 무릇 미래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는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백 년의 고통도 영원을 위해서는 짧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도 합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겸손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위해
우리에게 겸손과 순종을 그 고통의 기간을 통해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백 년이란 겸손과 순종을 배우는 기간이지요.
그리고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의 행복은 단념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의 행복을 얻으라는 뜻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위안과 격려도 받습니다.
종인 하갈보다 주인인 사라가 더 고통을 받는데
하느님의 사람일수록 고통을 더 받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 중에도 당신을 떠나지 않도록,
아니 고통 중에도 당신을 증거 하도록 단련하시는 것일 겁니다.
요즘 멘붕이라는 속어가 유행하는데
어려움이 닥치면 멘탈이 붕괴한다는 말의 준말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국가대표 감독이 되어 선수를 뽑는다면
그 혹독한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멘탈을 가진 사람을 뽑을 것이고,
또 그렇게 혹독한 시련을 줄 것입니다.
아직 저는 이렇게밖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처럼 주님의 선하심과
선하신 뜻을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일한 시간도 고통의 순간은 길게 느껴지고 행복한 순간은 짧게 느껴지지만,
그 짧은 순간의 행복이 긴 고통의 순간을 견디게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역으로“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란 함축된 말안에는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설명이 잘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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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부님께서 강론에 대한 부담을 말씀하시면서"강론만 없으면 할만하다"
고 하신 말씀에 공감이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냐면, 저도 신부님의 묵상글을 눈으로 읽어갈 때는 영화한편 보고 나오는 것처럼
심적 부담이 없는데 묵상글을 앞에 놓고 거울을 보듯이 제 자신을 봐야 하고 뭔가
제 이야기를 글로 표현한다는 것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 신부님의 말씀에 공감이 갔고
이 홈피에서 김찬선 신부님의 묵상글을 접할 때마다 제 자신과 씨름을 하게 된다 싶습니다.
누가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은 아니고 저 좋아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습니다.
메르스 때문에 총알 없는 전쟁터에서 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한달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믿을 것은 하느님 뿐이라는 생각이 거듭 드는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