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오늘 창세기 얘기는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하느님 체험 얘깁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얘기를 읽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다음 달 17일부터 8월 1일까지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할 계획입니다.
현재 계획으로는 그야말로 초기 프란치스칸들처럼 무전순례를 하려하는데
이 행진을 할 때 사람들이 오늘 창세기 아브라함처럼만 저희에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길손들을 보자 달려 나가 맞으며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종의 곁을 떠나게 되었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나그네를 맞이하다가 하느님을 맞이한다는 얘기는
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얘기입니다.
나그네를 잘 대해주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얘기가 나그네를 잘 대해주라는 교훈 이상이지요.
나그네는 그저 낯선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가까이 있는 사람까지 멀리 밀어내고,
가장 가까운 가족까지 낯선 사람으로 만드는 우리에게는
나그네를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인간관계를 성사적, 신비적으로 살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날 때 너와 나로만 만나면
그 안에서 하느님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범신론자로 오해를 받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쪼가리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하고
길 가운데 기어가는 지렁이를 그저 지렁이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종이쪼가리나 지렁이가 신이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종이쪼가리와 지렁이 안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만드시고 그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그 하느님을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아니, 안 계신다고 착각하지만 않는다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 보는 눈에는 이런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안 보이는 하느님을 보려는 갈망의 눈과
안 보이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에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망과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겸손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길손들을 나리라고 부르고
자신은 그들의 종이라고 얘기합니다.
자신을 종이라고 낮추는 그 순간 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내가 같이 사는 사람의 종이 되는 순간
그는 나의 주님이 되고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오늘 이런 오기를 부립니다.
나는 절대로 이 사람을 인간으로만 보지 않겠다!
나는 이 사람을 꼭 나의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보겠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아무리 나약한 이웃에게도 그분의 현존이 함께하시고 마음을 열고 소통할 때 축복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언제나 주님 은총 가득하시긴길 빕니다~
"사람이 때로는 오기도 필요하단다."고 예전에 무슨 말끝에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저는 이것을 보면서 오늘 이런 오기를 부립니다.
나는 절대로 이 사람을 인간으로만 보지 않겠다!
나는 이 사람을 꼭 나의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보겠다!"라는 대목을 읽는 순간 떠올랐습니다.
저도 오늘 오기를 부러보겠습니다.
오늘의 일상을 성사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그런 은총의 오늘이 되도록 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