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저에게 열등감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방에서 화분을 키울 때 화분의 꽃이 시원치 않게 피거나
꽃의 이파리들이 시들하거나 윤기가 없을 때 저는 그렇습니다.
이 열등감의 시작은 오래 되었는데
옛날에 제가 카나리아 담당일 때 카나리아가 새끼를 까지 않는데
다른 형제, 특히 돌아가신 하 신부님이 키우면 새끼를 많이 까고,
또 제가 난을 키울 때는 촉대가 한 번도 올라오지 않는데
다른 형제가 키울 때는 자주 꽃도 피우고 향도 피우는 거였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물을 주면 꽃이 생기를 띄고
미워하면서 줄을 주면 꽃이 시들해진다는 말을 듣고
제 딴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우려고 했는데도 그러니
혹시 제 몸에서 살기나 독기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했지요.
저는 제가 프란치스코처럼 피조물을 형제로 사랑하는 저이기를 바라고,
그래서 저에게서 사랑과 생명의 기운이 뻗쳐나가기를 바라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사랑하고프고 생명을 주고픈 사람일 뿐이지
사랑과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였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런 저를 인정하는 것이 저의 겸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생명의 기운이 뻗쳐나갑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옷자락에 손을 대자
주님께서는 당신에게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십니다.
그런데 저는 안수를 할 때 힘이 나가는 느낌이 없습니다.
특히 병자에게 안수를 할 때 제발 저를 통해 사랑의 기운이 나가
병자가 치유되거나 적어도 마음의 위안이나 평안을 얻기를 바라며
간절히 안수를 하는데도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적이 없으며
그래서 제가 안수한 다음 치유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다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저의 믿음 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찬미>에서 “당신은 힘세시나이다.”라고도 고백하지만
“당신은 힘이시나이다.”라고도 고백합니다.
저는 힘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힘이 없을 때 빠져나갈 힘도 없지만
하느님은 존재 자체가 힘이시라는 얘기이고
그렇기에 힘이 있기도 하시고 없기도 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아무리 힘이 빠져나가도 고갈이 없으신 분이라는 얘기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Tu es Amor et Caritas”라고 얘기합니다.
“Amor”가 사랑의 일반적인 표현이고
인간의 감성적이고 육적인 사랑까지 포함하는 말이라면
“Caritas”는 높은 차원의 사랑, 신적인 사랑을 내포하고,
덕德으로서의 사랑, 곧 힘으로서의 사랑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당신은 우리의 믿음이시나이다.”라는 고백 다음에
“당신은 우리의 사랑이시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데
오늘 하혈하는 여인이나 회당장 야이로처럼 믿을 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의 된다는 뜻일 겁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허용이고 수용입니다.
믿는 사람을 우리는 내 집에 들어오도록 허용하듯이
우리가 믿을 때 하느님의 힘과 사랑은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거듭된 말씀은 그러므로
나는 나을 거라는 자기긍정의 힘이 구원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의 힘과 사랑을 끌어들여
나에게 치유와 구원이 되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덕은 선을 실행하는 힘이고 선이 쌓이면 사랑이 되고 사랑은 곧 하느님이시다,
라는 여기 저기서 귀로 들은 것은 있어서......
수용의 극치가 십자가란 말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두려움 없이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는 걸 입으로는 말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실천적 무신론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연민을 느낄 때가 어디 한두번 일까요....!
"믿음없는 저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