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오늘 1 독서인 아가서는 사랑하는 이를 애타게 찾는 여인을 묘사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막달라 마리아 성녀가 아가서의 이 여인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오늘 성무일도 독서에서 성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리아는 찾았지만 처음에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찾았기에 찾아냈습니다.
찾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애타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소망이 더욱 강렬해져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룩한 열망은 그 성취가 지체될 때 더욱 커집니다.
열망이 지체되어 시든다면 그것은 참된 열망이 아니었다는 표시입니다.”
마리아에 견주어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의 사랑은
주님을 만나고픈 열망은커녕 소망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인 사도들,
사도들 중에서도 사랑을 많이 받은 베드로와 요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마리아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알리자 무덤까지 달려오기는 하지만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그냥 돌아서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아니 계심, 곧 부재不在를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 주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들은 진짜 주님을 찾지 않았을까요?
찾지 않았다면 마리아처럼 왜 주님을 찾지 않은 것이고,
우리도 찾지 않는다면 왜 주님을 찾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만나고픈 소망이 아예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소망을 포기하고 찾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포기하고 없는 소망이란 과거적 소망이라는 얘기이고
주님의 부재를 확인하고는 그것으로 그만인 소망이라는 얘기이지요.
체념적이든 자포자기적이든 주님의 부재를 기정사실화하고
더 이상 주님을 만나려하지도 않고 그래서 찾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너무나 쉽게 주님의 부재를 확인하고는
주님을 만나려는 소망을 접고 찾으려는 열망을 꺼버립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소망을 열망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 계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렸을 적 보물찾기에 비교를 하면
선생님이 보물을 분명히 숨기셨는데 몇 군데 찾아보고는
없다고 너무 쉽게 단정을 내리고는 더 이상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찾기 쉽게 보물을 숨기실 리가 없지요.
너무도 찾기 쉽게 보물을 숨기는 선생님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쉽게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하고,
한두 번 찾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끈질기게 찾아야 하며,
찾을 때까지, 그야말로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보물은 없고, 선생님이 거짓말 한 거라고 단정하거나
보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내게는 보물발견과 같은 행운은 없다고 비관적으로 포기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자문을 해봐야 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보물입니까?
어떻게 해서든 꼭 갖고 싶은 보물입니까?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끈질기게 찾는 보물입니까?
주님을 만나고픈 나의 소망은 주님을 찾는 열망으로 발전하고 있습니까?
왜 사느냐고 묻는 질문에 삶이 뭔지 모르니까 산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시원과 마침, 다시 말해 인생의 시작과 끝을 모르기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살아 보는 거기까지가 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구,
"우리는 보물은 없고, 선생님이 거짓말 한 거라고 단정하거나
보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내게는 보물발견과 같은 행운은 없다고 비관적으로 포기하는" 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어 함께 가는, 그래서 평화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인 보물을 찾고 만나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 고행의 길을 걷고 계시는 신부님과 함께 동참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더욱 이런 마음이 강한 열망으로 다가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