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도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공동체,
다시 말해 광야를 건너간 파스카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기념해야 할 것들에 대해 어제, 오늘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는 지난 16일 동안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진도 팽목항을 떠나 목적지 산청 성심원을 향해 왔고
오늘 오후가 되면 마침내 목적지인 성심원에 도착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지나오고 건너온 공동체입니다.
우선 우리는 지나온 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시간적으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왔듯이
우리도 이스라엘보다는 짧지만 16일이라는 긴 날들을 지나왔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공간적으로 광야를 지나왔듯이
우리도 여러 마을, 곧 낯설고 물 설은 곳을 지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긴 시간 힘든 과정을 지나왔으며
중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삼중도,
곧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을 지나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지나오며 진정 죄에서 정화되었습니까?
우리는 이 과정을 지나오며 진정 은총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이 과정을 지나오며 차츰 주님과 공동체와 일치하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건너왔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홍해 바다를 건너온 것처럼
우리도 강과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가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죽음과 생명의 그 위험을 통과한 것인데
우리도 진정 죽음의 위험을 통과하여 생명의 땅으로 건너왔습니까?
우리가 진정 지나오고 건너온 사람들이라면
이제 우리는 어제 레위기 말씀처럼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 하고
오늘 레위기의 말씀처럼 희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희년禧年이란 50년 만에 찾아오는 대사면의 해입니다.
우리도 이번 광복절에 사면이란 것을 한다고 하는데
사면이란 이렇듯이 공동체적으로 기쁜 날에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묶인 이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쁜 짓을 수없이 한 재벌이나 정치인들을 풀어주는데
희년의 참 뜻은 모든 인간이 죄와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와 실제적인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며
자신은 죄에서 해방되고 다른 사람은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와 억압의 교차점에 욕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남을 억압하는 죄를 짓는 것인데
풀어 말하면 나는 욕심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나의 욕심 때문에 억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이란 먼저 나를 사로잡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힌다고 흔히 말하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은 남도 사로잡아 남도 속박하고 억압합니다.
자신만 욕심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남도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런 욕심에서 나도 해방되고 남도 해방되는 희년의 삶을 살라고
초대도 받고 요구도 받는 우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죽음을 부른다는 이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욕심은 왜, 일까...?
무엇이 채워지지 않아서인가....
채울수 있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죄도 고백해야겠지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래서 자신도 억압하고 남도 억압하는 끝없는 욕심은 어디서 오는 걸
까...진지하게 돌아보는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