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저로 하여금 즉시 프란치스코의 얘기를 연상케 합니다.
출세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프란치스코에게 환시의 주님께서는
종과 주인 중에 누구를 섬기는 것이 더 유익한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종과 주인 중에 누구를 섬기는 것이 더 유익한가와 같이
너무도 자명한 질문에 대답을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이렇게 명백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선택을 요구받을 때
선택을 안 하거나 선택을 미룰 사람도 하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프란치스코의 차이는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주인과 종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질문을 받았는지 여부와
질문에서 더 나아가 선택을 하였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습니까?
진정 일생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우리에겐 없습니까?
수도자 중에 이런 질문을 받지 않고 수도생활을 선택한 분도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도 이런 질문을 다 받았을 것입니다.
스치는 생각을 통해서,
누군가의 지나가는 말을 통해서,
오늘 독서와 복음과 같이 성경을 통해서 질문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주님께서 내게 하신 질문이라고 생각지 않았는지 모르고,
어쩌면 주님의 질문임을 알면서도 듣지 못한 척 피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두루뭉술 살아가기도 하고
양다리 걸치며 살아가기도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다른 복음에서 비유로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정면으로 하느님의 뜻 따르기를 거부하였다면
나중에 회개하고 제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나설 텐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생각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였기에
하느님의 뜻을 거역치 않은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거역하곤 하지요.
또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이면서도
우리의 주님, 또는 나의 주님이 되지 못하시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되지 못하시는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제가 자주 얘기하는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대놓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존재하신다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실 뿐,
그 하느님을 내 안으로 깊이 모셔 들이지 않기에
하느님은 내 안에 계시지도 않고 나의 주인님도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계셔도 나의 삶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시고
나의 행동이나 실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내게 생명이 되지 못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인삼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인삼을 먹지 않아 내게 아무런 효능이 없습니다.
왜 먹지 않습니까?
지금 나는 충분히 건강하기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필요 없을 뿐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먹으라고 하니
맛보려고도 않고, 귀찮고 성가시다고만 할 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생명의 빵과 생명의 말씀을 맛보고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