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골로새서가 시작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골로새 신자들에게 인사와 축복을 전한 다음
골로새 신자들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얘기를 합니다.
골로새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갖고 있고,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가 가르친 형제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고,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믿음과 사랑이 자란다면
저의 형제들이 자랑스럽고 고마울 것이고,
이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스승은 제자가 잘 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인데
그런데 그 잘 된다는 것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자녀나 제자가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형제와 이웃 간에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도 이런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데
골로새 신자들의 이런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이미 마련된 희망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나중에까지 남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고,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향주3덕이 되었는데
이 세 가지 덕이 제일 중요한 덕이라는 뜻이고
상호밀접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믿음 없이 희망 없고, 믿음 없이 사랑 없으며
사랑에 대한 믿음 없이 희망도 없다는 식으로 우리는 보통 얘기하고,
그리고 희망의 기초가 믿음이라고 보통 얘기하지요.
그런데 오늘 골로새서에서는 믿음과 사랑이 희망에 근거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곧, 그 희망이란 것이 다른 희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 곧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란 이 세상 것에 희망을 두지 않고
하느님 나라와 천상 것들에 희망을 두는 사람이고,
천상 것에 희망을 두기에 이 세상 것들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고
성도들 간에 사랑하고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할 것입니다.
그 반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지요.
이 세상 것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이유나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천상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상 것을 희망하는 것은
천상 것이 우리에게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천상 것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내가 좋아하는 찌개를 엄마가 끓여놓았을 거야!
이렇게 우리는 엄마가 끓인 찌개가 먹고 싶고,
먹고 싶은 찌개를 엄마가 준비해 놓았을 거라고 믿는데
그것은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지요.
서로 사랑하며 천상 것을 같이 희망하는 우리 공동체는
우리를 위해 천상 것을 이미 마련해놓고 기다리시는
우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서 비롯됨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희망 없는 믿음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의 바람이든 다음 세상에 대한 바람이든 희망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고통속에서 기다림도 인내도 견디는 힘도 생기고 그 힘으로 순간 순간을 사랑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희망은 존재에의 힘이다"라고 말하는가 봅니다.
살면서 견디고 버티는 힘이 없었다면 그 어려운 순간 순간들을 어떻게 지나올 수 있었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절망적일 수록 희망의 끄나풀을 어떻게 해서라도 잡아 한다는 것......그래서
이렇게 기도 합니다. 저는, "주님, 저에게 버티는 힘을 주십시요."
저도 제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저도 제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고통의 순간 죽음의 순간에 할 수 있었던 것은 견디는 힘...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견디는 힘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었다는 것......
성경에서의 이해차원이 아니라 삶에서 얼마든지 체득되는 것 아닌가.....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