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교회는 위대한 신앙의 또 다른 선배들을 복자품에 올리려 합니다.
103위 성인과 125위 복자가 박해시대의 성인들이라면
지금 시복작업을 추진하는 분들은 안중근, 이광재, 김선영 등
근대 역사의 격랑 가운데서 신앙을 훌륭히 증거한 분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시복작업을 추진하는 것이 제겐 왠지 흔쾌하지 않습니다.
비딱한 심사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샤를르 드 후꼬의 정신을 따르는 후예들이
자기들의 창설자라고 할 수 있는 샤를르 드 후꼬를
성인품에 올리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역시 샤를르 드 후꼬의 후예들답게
참으로 작음을 충실히 살고 있고, 그렇게 노력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분들에 비춰 우리를 반성한다면
우리는 성인들의 삶은 그리 잘 알지도 못하고,
성인들의 후예답게 그 삶을 살려고 별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성인이 그렇게 많은데도 또 성인을 만들려고 욕심 부린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시복추진을 하는 분들이
결코 성인들 되기에 부족한 분들이라거나
이분들이 성인 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성인은 욕심으로 가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욕심으로 성인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충실히 따른 그들의 삶을 닮고 따르기 위해서지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많은 성인을 그저 공경하고 본받자고 할 것이 아니라
본받고자 하는 한분, 한분의 삶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이고,
같은 의미에서 저는 이 광재 사제의 삶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왜냐면 이 광재 사제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기에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이분의 삶을 마땅히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광재 사제는 1909년 2남 1녀 중 막내로 강원도에서 태어났는데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도록 다른 집에 보내려고 할 정도로
집안은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가난했지만 신앙은 깊은 집안에 태어났기에
20리가 넘는 길을 매일 미사를 다녔고 그런 신앙심 때문에
본당 신부님의 눈에 들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신학교에서는 <8품 신부>라는 별명을 동료들로부터 들을 정도로
성실하면서도 작고 순박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그였기에 1938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가 1937년
오기선 신부님과 함께 첫 번째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제가 되고 난 뒤의 훌륭한 생애를 나눠서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남달랐습니다.
어렸을 때 워낙 가난했기 때문인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컸고
그래서 가난한 아이들의 장학금을 대주거나, 한 겨울 거지에게는
자신의 버선을 벗어 준 것과 같은 일을 많이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선행을 다른 사람에 돌리곤 하여
가난과 겸손과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룬 프란치스칸 사제였습니다.
두 번째는 목자로서의 성실함입니다.
신학생 때부터 성실함으로 동료들의 존경을 받은 그는
사제가 된 후에도 목자로서의 역할을 아주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40리 떨어진 곳에서 늦은 저녁 병자성사를 청하자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그 밤에 다녀오다
호랑이를 만나 죽을 뻔한 적도 있고,
농번기에는 일하는 신자들을 위해 새벽 3시에 미사를 드려주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공산당의 감시 속에서도 성무집행에 성실하였고,
시골신자들이 시간관념이 없어 아무 때나 성사를 청해도
아무 불평 없이 성사를 거행한 성실한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스러움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건 사랑이었고
프란치스칸인 콜베 성인처럼 죽기까지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리고 이북이 공산화되자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넘어 오게 되었는데,
그도 남쪽으로 넘어올 수 있었지만 자신은 신자들을 위해 남아 있으면서
양양을 통해 피난하던 이들을 목숨을 걸고 그 피난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6. 25 전쟁이 일어나고 그마저 체포되어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신앙 때문에 순교를 하게 되었는데
총을 맞고 죽어가던 사람들이 물을 달라고 하자
그 역시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도 “응, 내가 가서 떠다 주지”,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하였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합니다.
너무도 간단하게 이 광재 사제의 삶을 더듬으면서 생각게 된 것은
마지막 죽기까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한 삶도 거룩하지만
일생 작은 일, 자기에게 맡겨진 일, 자기에게 맡겨진 신자들에게
자기를 내어준 그의 작은 성실함이 어쩌면 더 거룩하고
프란치스칸다운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후배로서 부끄러움과 함께
선배의 훌륭함과 거룩함을 공경하며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