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당신 제자로 부르신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일부로 마태오를 찾아왔다는 얘기는 분명 없고,
마태오 사도를 눈여겨보셨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다른 목적 때문에 지나가시는데 어떻게 눈에 띄어
부르심 받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태오는 진정 그렇게 부르심 받은 걸까요?
이것을 확대해서 얘기하면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 문제입니다.
마태오가 나중에 사도가 된 것은 주님의 기도와 숙고 후에 된 거지만
제자가 된 것은 축구 지도자가 길 가다 재능 있는 선수를 보고 발탁하듯,
그야말로 지나가시다가 눈에 띄어 발탁이 된, 그런 우연한 사건일까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서 보고, 마태오 입장에서 보면
우연히 주님의 눈에 띄어 제자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입장, 특히 하느님의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마태오 사도뿐 아니라 무릇 모든 부르심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에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부르시고 뽑으시는 것으로 얘기하지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더욱이 마태오 사도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필요충분조건을 갖췄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에게
마태오 사도는 이 조건에 딱 맞는 죄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에 맞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사랑하기에 좋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그런 조건을 충분히 채운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만을 사랑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을 더 사랑하시고
당신 사랑이 더 필요한 죄인을 필요로 하시고,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마태오 사도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제자로 부르신 것은 첫째로 마태오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 특히 모든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인들의 대명사인 마태오 사도를 부르시면서 다른 모든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 마태오를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사도로 삼으시면서
다른 모든 죄인들도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사도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죄인도 하느님께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
죄인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모든 죄인들에게 깨닫게 하는 데 마태오 사도는 적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마태오 사도의 부르심 안에서 이런 사랑을 배웁니다.
부모의 마음은 지지리도 못난 자식에게 더 마음이 가고
사형수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어머니의 품이라고 하듯이,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알아들으라고 부모를 우리에게 선물하셨다는
글을 어딘가 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비록 회칠한 무덤으로 살아가는 죄인이지만 저항의 힘을 뺄 때
상대로 부터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건데 죄가 문제가 아니라 저항의 힘을 빼는 것,
이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예수님 앞에서 보여지는 바리사이의 태도는 저항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에게 그런 바리사이의 저항의 태도는 없는지 돌아보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