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그리스도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어제는 헤로데의 궁금증과 연관지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얘기하는 것임에 비해
오늘은 예수님께서 친히 궁금증을 보이십니다.
곧,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제자들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물으심이 진정
당신을 어떻게 생각들 하는지 궁금해서 물으시는 것인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아는 정도를 모르시기에 궁금해 하실 리도 없고,
사람들이 당신을 잘못 알고 있을까봐 조바심하여
궁금해 하실 리도 없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치 않고,
일반 군중이 당신을 몰이해 할지라도 조바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잘못 알고 있지는 않은지 궁금하시고 조바심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거의 틀림없이 당신의 정체를 잘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비록 당신의 정체를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정확히 알고 대답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모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아도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는 잘 알지 못하기 십상입니다.
루카복음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한 마르코복음의 고백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로 바꾼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루카복음의 베드로 사도가 마르코복음의 베드로 사도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 강조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도들이나 우리나 그리스도의 인성보다는 신성을 더 믿고 싶고,
그리스도가 인간이기보다는 신이기를 더 바란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처럼 약하고, 힘없고,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강하고, 힘세고, 죽음을 모르는 그리스도를 바라고,
우리도 그렇게 강하고, 힘세고, 죽음을 모르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하자
당신을 굳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바꿔 말씀하시며
당신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신자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이 부르기 좋아하는
그 <능력의 주님>을 사도들이나 우리나 바라는데
당신은 능력의 주님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과 죽음으로까지 가셨다는 것이 때때로 삶이 절망적일 때
믿음과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는 것,
그래서 믿음이 결코 공허하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 다는 것......
진정한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를........
문득, 떠오름니다.
칠층산의 어느 구절에
"사랑이 무엇인지 아느냐?......하느님을 사랑하는 법과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스도한테서 배우라! 이 '십자가'와 '사랑'에서........"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하는지를....!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깨닫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