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어떻게 믿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 대한 오늘 로마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심이 없었을까?
아브라함은 태어날 때부터 믿음이라는 DNA를 갖고 태어나
불신이나 의심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을까?
제 생각에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의 조상이라 하더라도
본디 그렇게 태어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닐 것이고,
만일 그렇게 태어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라면
그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고 불신과 의심의 사람이었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큰 믿음의 시련을 통해 믿음에 도달했을 겁니다.
의심이라는 믿음의 시련 없이 믿음은 자라지도 굳세어지지도 않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믿음의 시련을 우리보다 더 많이 받았습니다.
늙은 나이에 하느님을 믿고 고향을 떠나라고 했을 때 어찌 의구심이 없고
나그네살이 하는 동안에도 어찌 의구심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늙은 나이에다가 아직 자식이 없는데도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처음부터 그리고 내내 철석같이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늘그막에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을 때
하느님의 약속을 선선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은 더더욱 쉽게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심이 갔지만 믿기로 한 것이고,
이 믿음의 결단 때문에 믿음의 은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렇게 말을 하곤 하지요.
일단 믿어보자!
아브라함은 매번 이렇게 믿기로 한 것이고,
의심과 믿음의 결단이 쌓이고 쌓여 큰 믿음, 굳건한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의심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 의심하는 것은 좋고,
더 잘, 더 완전히 믿기 위해서 더 큰 의심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믿지 않기 위해서 의심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니, 어쩌면 믿지 않기 위해 의심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믿게 되었을 때 그 믿음이 더 강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이 더 나쁩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자기 믿음에 대해 한 번도 의심치 않은,
그래서 자기 믿음에 대한 믿음이 사실은 없는, 그런 믿음이 문제입니다.
나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