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르침,
아니 오늘날에 더욱 유효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우리로 인해 탄식을 하고 있고,
우리와 함께 진통을 겪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언젠가 영광스런 자유를 얻게 될 터인데
우리에 의해 구원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과 피조물은 남남이 아닙니다.
남남이 아닐뿐더러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불교의 중심사상인 불이사상不二思想과 통한다 할 것입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분명 다르지요.
그러나 다르지만 남이 아니고, 다르지만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나이고, 다르지 않고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없다면 다를 뿐이고 별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이 같이 창조하셨고 그래서 같은 아버지이기에
어쩔 수 없이 피조물로서 하나이고 한 운명 공동체로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입니다.
인간만이 구원받을 존재가 아니고 피조물도 구원받을 존재이며,
피조물 없이 인간만으로 구원될 수 있고,
인간 없이 피조물이 구원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존재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피조물만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8,23)
피조물만 구원을, 곧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이미 받은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곧 우리의 몸도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 그것은 첫 선물일 뿐이며 완성은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몸이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아직 완전한 해방,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고 종말의 부활 때에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 인간은 그로서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예수님처럼
완전성에 도달한 것이 아니므로 더욱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 인간 자신은 물론 피조물도 바라고 희망하고 있다는 오늘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19절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되기를 왜 피조물이 기다리겠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땅이 벌을 받음을 얘기합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3,17)
본래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란 흙이라는 뜻이고 흙에서 나온 존재이니
아담이 죄를 지어 벌을 받을 때 흙도 오염이 되고 벌을 받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하느님 자녀로서의 구원도, 해방도 인간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피조물은 하느님 계시의 또 다른 책이며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피조물을 사다리 삼아 인간이 당신께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피조물을 사다리 삼아 하느님께 올랐을 때
사다리를 걷어차지 않고 다른 사람도 오르게 하셨고,
피조물도 마침내 끌어올리게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새회칙, "찬미받으소서"와 함께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