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제가 어렸을 때 허우대만 번드르 하지 실속이 없다느니,
허우대만 멀쩡하지 속 빈 강정이라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사무엘은 사울 대신 왕이 될 사람을 찾으러 이사이의 집에 가
그 아들들을 하나씩 면접하는데 맏아들이 허우대가 좋은 까닭에
그가 왕이 될 사람일 것이라고 오판을 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언자 사무엘조차도 이렇게 오판을 하니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오판을 많이 할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직관 능력이 비교적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의 성격유형 검사를 해주신 심리학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저의 성격 유형은 감각 능력보다는 직관 능력이 뛰어나기에
95% 정도는 직관적인 파악과 판단이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의 직관을 과신하다가 5%의 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의 직관 능력을 믿다가
제 일생에 실수를 크게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성소 식별에 있어서 참 괜찮다고 생각한 형제가 그렇지 않거나
문제가 있다고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졌던 형제가 그렇지 않았던 경험이지요.
그러나 오늘 독서에 비추어 볼 때 저의 더 큰 실수는
사람의 됨됨이를 잘못 보는, 가끔 있는 실수보다
사람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흔한 실수입니다.
물론 여기서 마음을 본다는 것은 독심술讀心術 차원이 아니지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것으로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독심술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잘 헤아려 더 잘 사랑하기 위한 마음보기인 거지요.
몇 년 전 한 해의 목표를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로 정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보기보다 형제의 고통을 더 보자는 뜻이었고
제가 사랑을 실패하는 많은 경우가 그의 고통보다는
그의 잘못을 더 잘 보기 때문에 그런 목표를 정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통은 우리가 잘 알 수 있고,
그런 경우 우리는 그의 잘못보다는 고통을 보기에 사랑을 합니다.
예를 들어, 큰 병을 앓고 있는 형제를 우리는 이해하려고 애쓰지요.
그러나 속병인 마음의 병이나 마음의 고통은 우리가 잘 보지 못하기에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물론 비슷하게 그의 잘못된 속마음도 잘 못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겉 아양에 속아 넘어가 큰 손실을 입거나
고쳐주어야 할 것을 고쳐주지 못하기도 하지요.
아무튼 예언자 사무엘도 그랬듯이 우리는 <마음보기>를 잘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만은 잘 알아야 합니다.
형제의 마음을 잘 못 보는 잘못을 범하는 나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지 그나마 마음을 보려고 애를 쓸 것이고,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겉만 보고 큰 오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만은 마음을 보려고 노력하는 하루가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