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
죄가 죄를 부른다.
이것을 저는 오늘 강론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끊어버리지 않는 한
무릇 모든 죄는 또 다른 죄, 더 큰 죄를 부릅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이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을 빨리 바꾸지 않고 방치하면
다른 유리창도 다 깨지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사람의 범죄 심리가 있는데
깨끗한 곳엔 쓰레기를 버리지 않지만 누가 한 번 쓰레기를 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쓰레기를 거리낌 없이 버리기 시작합니다.
횡단보도 신호를 모두가 지키면 아무도 위반하지 않지만
어떤 한 사람이 위반을 하면 덩달아 다른 사람들도 위반을 합니다.
이런 인간 죄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것이 뉴욕입니다.
지저분하고 범죄가 많았던 뉴욕이 사소한 경범죄를 강력하게 단속을 하고,
지저분한 낙서를 지우는 등 거리환경을 개선하였더니 범죄율이 떨어졌지요.
그런데 이것이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도 확장되는 현상이라면
한 사람 안에서 한 번의 죄가 여러 번의 죄를 부르기도 하고
한 가지 죄가 여러 가지 죄도 짓게 하는 현상도 있습니다.
한 번 도둑질이 여러 번 도둑질로 늘어나고,
<이왕 버린 몸> 심리 때문에 자포자기식으로 아무 죄나 막 짓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의 행위를 보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이런 것보다 더 고약한 죄의 확대와 확장입니다.
은폐하려다가 또 다른 죄, 더 큰 죄를 짓는 것 말입니다.
다윗이 애초에 간음죄를 숨기려 하지 않았으면 살인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간음죄를 덮어 감추려다가 살인죄까지 짓게 되었지요.
작은 천으로는 어디 한 부분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완전히 드러나지 않게 하려면 더 큰 천이 필요하듯 죄를 덮는 것도 같지요.
이런 현상을 우리는 지금 우리 정권에서도 보고 있습니다.
대통령선거 부정,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위안부 협상,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의 불의와 무책임과 무능을 덮으려다 보니
다른 더 나쁜 짓을 꾸며야 하고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덮어지지 않으니
지금 3년 내내 그 문제들에 대한 공방으로 국정이 마비되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다윗과 현 정부의 이런 잘못을 질타하면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처음의 작은 거짓말을 덮으려다
더 큰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죄의 확장 경험이 있지요.
그러기에 현 정부의 이런 잘못을 보면서
나는 그런 잘못이나 죄가 없는 양 그런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부에 대해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정부의 죄는 개인의 죄가 아니라 공적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개인일 때의 죄와 관구장일 때의 죄가 다른 것처럼
공적이면 공적일수록 더 많은 사람과 관련이 있고
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되지요.
그리고 권력자들은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죄를 덮기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틀어막으려 하고
그런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수없이 발생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확장성에 대해 크게 경계를 해야 하고
초등단계에서 죄를 인정하고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때 나 자신은 물론 정부에 대해서도
내일 나단이 그러하듯 준엄하게 따지고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