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어제 강론 끝에 말씀드린 대로 나단 예언자는
다윗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싫고 괴롭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더 싫겠지요.
나단보다 다윗이 더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 다윗이 성인임이 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첫째로 그 듣기 싫은 말을 듣는 것이고,
그것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은 것입니다.
사람이 좀스러울수록 조그만 싫은 소리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왜 듣지 않으려고 할까요?
그것은 그 조그만 것에도 자기 존재가 치명상을 입고
뿌리째 흔들릴 정도로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약한 바이러스에도 감염되고, 무균실에 있어야 하듯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허약한 사람도
작은 지적에도 큰 상처를 받고 흔들리기에 아예 그런 말을 차단하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말을 받아들인 다윗은 위대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이어지는 그의 회개입니다.
듣기 싫은 말을 듣는 것은 인격적인 그릇이 크기만 해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듣기 싫은 말을 듣고 회개까지 하는 것은
인간 됨됨이의 문제가 아니라 성스러운 것입니다.
다윗을 성왕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그의 지은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누구보다도 더 진실하게 뉘우치고 고쳤기 때문입니다.
죄로만 치면 우리보다도 더 엄청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의 성스러움의 핵심은 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점입니다.
죄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난다니 얼마나 대단하고 성스럽습니까?
저도 지금은 가끔 죄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죄 안에서 오히려 하느님 사랑을 더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특히 옛날에는 죄를 지으면 내 안에 갇히거나
죄지은 그에게 사로잡혀 지내곤 하였지요.
그런데 다윗은 자기 죄를 지적받고는 우리야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고
즉시 주님께 죄를 지었고, 주님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인간의 눈에서 감추려고 했고, 감추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다 보고 계심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음은
아직도 나의 죄를 하느님 앞에서 보지 않고
인간의 눈만 감추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이미 지은 죄보다 더 큰
감추는 죄, 하느님을 못 만나는 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