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드린 대로 예언자는 하기 싫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하도록 배속에서부터 성별되고 파견된 존재가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언자라면 이 세상 권력자가 듣기 싫어할지라도
그래서 그런 말 하면 박해가 닥치고 그러니 나도 말하기 싫더라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시니 오늘 예레미야처럼 말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자기 말을, 그것도 감정적으로 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그제 제가 한 말을 성찰해 봅니다.
예언자로서 한 말일까, 감정으로 내 말을 한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말을 하기 정말 싫습니다.
나이 먹어가며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것 점점 더 싫어집니다.
편하게 살고 싶고 점잖게 늙고 싶지만 해야 하기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제 의견이나 감정이 안 들어갔다고 할 수 있나요?
저의 말에 분명 불순물이 있고, 그래서 실은 더 말하기 싫지요.
그럼에도 불순물이 있음을 인정하며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것인데
이럴 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은 아주 귀에 솔깃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이 뭣입니까?
모든 죄, 모든 잘못, 모든 허물, 모든 약점 중에서 어떤 것일까요?
제 생각에 죄 외에는 모든 잘못, 허물, 약점을 덮어주고,
죄도 모르고 지은 죄는 모두 덮어주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니 알면서도 일부로 지은 죄까지 덮어줘서는 안 되고
덮어주는 것도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싫고 두렵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어떤 때는 사랑 때문에 덮어주고,
어떤 때는 사랑 때문에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의 죄를 들춰내고 끄집어내어 그를 깨버리고 싶을 때는 덮어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반대되는 미움과 분노 때문이거나
미움과 분노는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들춰내고 까발리고 싶을 때는 덮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고 그래서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오늘 바오로 사도의 이어지는 말씀처럼 그 이상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제가 과거에 양성을 많이 맡았고 지금도 맡고 있지만 제 경험을 놓고 볼 때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사랑 없이 한 형제를 성장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가 비록 잘못과 허물과 약점이 너무도 많고 실망스럽지만
훌륭한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고, 바라며
현재의 모든 잘못과 허물과 약점을 내가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덮어주는 것이 그의 성장에 그리고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때는 사랑 때문에 그리고 공동선 때문에 덮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덮어주지 않는 것은 굳이 사람들이 꼭 다 알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하되
그의 죄나 잘못, 허물이나 약점과 직면을 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도 자기의 죄와 잘못이나 허물과 직면케 하고
나도 편하기 위해서 모른 체 하고픈 마음을 버리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직면을 하는 건데 사실 같이 직면하는 거 정말 고통스럽지요.
혼자 속 썩이며 참는 것이 덜 고통스럽지 그것을 들춰내 보게 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견딤에는 그의 약점을 홀로 견디는 것과
약점을 같이 직면하는 그런 고통을 견디는 것,
그 두 가지가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