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이런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시련試鍊-훈련訓練-단련鍛>
‘선수로 뽑힌 사람은 혹독하게 훈련을 받듯 뽑힌 사람이 단련을 받는다.’
첫째 독서 신명기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입니다.
이집트에서 별 볼일 없던 떠돌이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크고 강한 민족, 수가 많은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
죄와 억압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끌어내셨음을 고백합니다.
사실 그들의 약한 신앙으로는 광야에서 겪게 될 시련이 두려워
이집트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을 거고,
시련이 그들의 약한 신앙을 강하게 단련시킨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예. 우리의 시련 중에는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자초한 시련도 있지만
이렇듯 하느님께서 주신 시련도 있는데 그것이 우리를 단련시키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알아보는 믿음도 우리에게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마땅한 응답도 있어야겠지요.
곧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주시는 시련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미성숙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시련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좋아하는 것이라면 시련도 아니지요.
그러므로 시련이 시련인 한 그 시련은 누구나 받아들이기 싫어하지만
미성숙한 사람은 무조건 싫다고 거부하는 반면에
성숙한 사람은 자기 성장을 위해서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시련뿐 아니라 오늘의 또 다른 주제인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유혹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유혹에 넘어가버리는 반면에
성숙한 사람은 유혹이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유혹을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유혹의 본질도 잘 알고, 형태도 잘 압니다.
유혹은 본래 유혹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좋고 싫음, 고통과 즐거움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술 먹는 것이 결코 즐거움이 아니고,
그래서 누가 술 먹자고 권하는 것이 전혀 유혹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술을 좋아하고 즐기고 싶은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반대의 유혹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은 유혹도 있지만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유혹도 있습니다.
어쩌면 싫은 것을 피하고픈 유혹이 더 극복하기 어려운 유혹일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과 싫어하는 사람과 사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큰 어려움이고 고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미성숙할수록 좋은 것은 거부하고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며
반대로 나쁜 것을 선택하고 싫어하는 것은 피하겠지요.
그리고 성숙할수록 나쁜 것은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며
좋은 것은 선택하고 좋아하는 것은 피하겠지요.
이것을 신앙적으로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곧 심령이 강한 사람은 아무리 악령이
좋아하는 것은 가지라고 유혹하고 싫어하는 십자가는 지지마라고 부추겨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음은 물론 유혹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성장할 겁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지 않고 광야로 나가
악령과 대면하고 그의 유혹에 담대하게 맞서 싸워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순 제 1 주일은 승리주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