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면
그 말씀에서 ‘믿는 것은 보는 것’이라는 말이 유추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단세포적으로 보면 믿는 것과 보는 것은 전혀 다르고 상관이 없지만
유기적으로 보면 믿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지만 상관이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해와 비는 다르고 상관이 없는 거 같지만
해가 비를 만드니 해와 비는 매우 밀접한 관계지요.
해가 수증기를 만들지 않으면 어떻게 비가 만들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관계성을 볼 줄 모르는 것이 단세포적으로 보는 것이고,
이 관계성을 볼 줄 아는 것이 유기체적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관계성을 유기체적으로 보는 것도 여러 차원입니다.
과학자가 보는 것과 시인이 보는 것이 다르고,
시인이 보는 것과 신앙인 보는 것이 다릅니다.
과학자는 물리적인 관계성을 볼 것이고,
시인은 의미적인 관계성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해와 비를 그저 사랑의 의미에서 관계성을 본다면
신앙인은 그 사랑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사랑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보이는 것을 보는 데는 믿음이 전혀 필요치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데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내가 다가가거나 선물을 해도 쌀쌀맞게 거절을 해도 사랑한다고 믿는 거지,
이미 사랑한다는 고백을 그녀가 해왔고 사랑스러워 눈을 떼지 못하는데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말한다면 생뚱맞고 오히려 이상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셔서 왔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스스로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당신을 보내신 분,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고
그것을 우리가 믿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버려두지 않고 당신을 보내신 것이고,
그러기에 당신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라는 것을 믿어 알고,
그래서 당신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비가 오는 것을 그저 자연현상으로만 볼 수 있고,
비가 자기 스스로 와야겠다고 작정하고 왔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늘에 기우제를 지낸 사람은 그 비가 하늘이 내려준 비라고 믿듯이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이라고 믿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더 말할 필요 없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는 사람은 사람들 안에서 그를 보내신 하느님을 볼 것이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이 말씀도 믿기 그리 어렵지 않겠지요?
그래 주님께서 심판이나 하려고 이 세상에 굳이 오셨겠습니까?
우리 인간이라면 뭘 좀 하라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했는데도
그리 하지 않으면 화딱지가 나서 달려오고 와서는 벌을 내리겠지만
주님이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지 않고 고작 심판이나 하러 오시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만다면 하느님을 쩨쩨하고 하릴없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고
인간화하는 것이고, 사랑 없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중에는 종종 하느님을 이런 사랑 없는 분으로 만들어
스스로 심판과 단죄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타깝기는 합니다.
설마 저나 여러분이 그런 사람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