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셨을까?
그것도 세 번씩이나.
베드로가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서 물으셨을까요?
아니면 알지만 입으로 직접 고백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 물으신 거고,
그것도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세 번이나 묻고 들으시려 한 것일까요?
하나는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리라는 것 말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속속들이 아실 수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모르는 그런 숙맥이 아니고
사랑 불감증 환자는 더더욱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지를 왜 물으신 것일까요?
세 번 배반했으니 세 번 사랑을 고백하라고 강요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세 번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만회할 기회를 주시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금간 사랑을 회복하듯이 잘못을 만회하도록
입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지 않으셨다면 사랑한다는 고백을 감히 할 수도 없고,
스스로 나서서 할 수 없는 베드로의 처지를 예수님께서 헤아리신 것입니다.
실상 우리 같으면 베드로를 차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세 번이나 배신한 놈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그런 놈의 사랑 고백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역겹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 품에 안겼던 여자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 여자가 다른 남자와 헤어지고 난 뒤 다시 찾아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린 그 더러운 입으로 사랑한다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을 원한다고 하시니 베드로는
자기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벅차 눈물이 납니다.
복음에서 세 번이나 물으시자 슬퍼졌다고 하는데 그때 그 슬픔은
상실의 슬픔이 아니라 주님의 큰 사랑에 비해 자신의 사랑은
얼마나 더럽고, 역겹고, 보잘것없는지, 그 비교에서 나온 슬픔인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문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당신의 양떼를 맡기기 위해 변죽을 울리는 질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다음
매번 당신의 양떼를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양떼를 맡길 때 양들을 사랑하는지 물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리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묻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렇게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시는 이유는 양들이 당신 양들이기 때문이고,
양들을 맡기시면서 당신을 사랑하는지 묻는 이유도
양들이 당신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베드로의 양들이라면 베드로에게 맡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양들을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양들은 주님의 양들이고,
그러기에 주님의 양떼를 잘 돌보려면 주님을 사랑해야겠지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그 양떼까지 사랑할 이유가 없지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양떼를 맡기려고 하면
그는 당장 내 양들을 치기도 힘든데 왜 다른 양까지 맡느냐고 할 겁니다.
옛날에 먹고 살기 힘들 때 친척이나 친구가 자기 아이를 맡기고 죽으면
웬만큼 친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남의 아이를 맡아주지 않았지요.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관구장을 하였는데 저의 형제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거나 어려운 형제들의 문제를 제게 떠넘기면
누구는 룰루랄라하며 살고 누구는 다른 사람 문제까지 책임지고
낑낑대며 살아야 하나 하고 저는 생각하곤 하였지요.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맡겨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처럼 당신의 양을 맡기신 거고
우리는 주님 사랑 때문에 그를 잘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주님을 사랑해야만 그를 잘 돌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