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분이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위인과 성인이 있습니다.
위인전이 있고 성인전이 있습니다.
제가 성소계발의 책임을 겸직할 때 성소자들이 오면
제가 두 가지를 꼭 물었습니다.
좌우명은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이냐?
닮고 싶은 위인이 누구였고 지금은 누구냐?
아무런 좌우명도 없고 닮고 싶은 위인도 없으면
그것으로 성소가 없다고 판단을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목표 없이 되는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뜻이며
지금까지 닮고 싶은 위인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닮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되는대로 살아왔고 닮고 싶은 분도 없었지만
이제 깨달아 예수님과 프란치스코를 닮는 삶을 살고자 마음먹고
저희 수도원을 찾아온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본 받고 싶은 위인이 없이 살아왔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본 받고 싶은 성인이 생기고
그분을 닮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아주, 아주 정말 특별한 사람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위인과 성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일까?
위인과 성인의 차이는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위인은 그 인물 자신이 큰 존재입니다.
큰 뜻을 품고 있고,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큰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에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있으며 그들 가운데서 뛰어난 존재일 뿐입니다.
이에 비해 성인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늘 하느님 앞에 있으며
그 자신이 큰 인물이 아니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듯
자기는 주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인들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자기에게 몰려와도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자신은 늘 하느님 앞에 머물며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를 훌륭하다고 추켜세워도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작은 자로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인들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지만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이런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하신 분입니다.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오.”라고 세례자 요한은 분명하게 얘기하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고 하며 주님을 가리키고,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내어드립니다.
저는 위인도 못 되지만 성인은 더더욱 못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인은 못 되도 좋지만 성인은 되어야 할 존재지요.
이것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 묵상하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