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믿고 실천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하느님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서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었지만,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주자
그는 곧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즈카르야의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상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벙어리가 되었던 것은,
그의 믿음이 없음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접근하다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상과 벌로 구분되며,
결국 하느님의 모습은 상선벌악의 모습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 있어서
하느님을 상선벌악의 심판자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 생각이 옳은 것인가요?
즈카르야의 입장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아내가 임신하기 전에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본인의 잘못이던 아니던지를 따지기 이전에,
1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벙어리가 될 것을 예언하면서
하나의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즈카르야가 끝까지 믿지 못했다면,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면,
아들이 태어날 때
자신이 다시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믿지 못했을 것이고,
다시 말을 하게 되었어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을 찬미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
우리는 그것의 이유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유들은
대부분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벌로써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즈카르야의 예에서처럼
오히려 고통의 시간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하느님의 뜻을 다시 헤아릴 수 있는,
그래서 하느님과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즉 고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부르시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