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무전순례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때
바로 오늘 복음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들은 생각 없이 무전체험이라고 하고
심지어 무전여행이라고 하는 형제들이 있었으며
실제로 제가 미국 가 있을 때 형제들의 체험기를 읽어보니
구걸한 돈으로 제주도까지 가 자전거 여행한 형제도 있었습니다.
무전체험이나 무전여행도 아니 한 것보다 좋고,
그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얻게 하기에 좋은 것이긴 하지만
무전체험과 무전여행은 제가 의도한 무전순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무전체험이나 여행은 자기의 성장을 위한 체험이나 여행인데 비해
무전순례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다른 이를 위한 것,
다시 말해서 이웃의 복음화,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곧 우리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병자를 고쳐주고, 죽은 이를 살려주고, 나병환자를 고쳐주는 것은
돈 얼마를 주고, 쌀 얼마를 주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니지요.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어찌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은 그래도 실행하려고 해도
나병환자의 치유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악령 추방과 같은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아예 제켜놓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주님께서는 지레 포기하거나 아예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그것을 우리가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고,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은 당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는 일 같은 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지 내 영역이 아니라고 빨리 포기하고 싶어 합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남을 위한 복음화이고,
나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왜 괜히 붙잡고 끙끙거리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 죽어가도 그러겠습니까?
그때는 죽어가는 자식 살리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내가 할 수 모든 것을 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데도 안 되면 그 때 하느님께서 살려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렇듯 할 수 없어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고쳐주는 일, 살려주는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랑의 마음과
하느님께서는 나를 도구삼아 고쳐주시고 살리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고 이런 사랑의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평화의 기도>를 오래간만에 다시 한 번 바쳐봅니다.
주님,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다주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