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바리사이들이 주님께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을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랄까 의문이 드는 겁니다.
사랑을 꼭 계명으로 해야 하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저절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하느님께서도 계명으로 하는 사랑,
다시 말해서 해야 되니까 하는 그런 사랑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사랑을 더 원치 않으실까요?
물론입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사랑,
우러나와서 하는 사랑을 하느님께서는 더 원하시고,
그럴 때 계명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명으로라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왜 계명으로라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계명, 그것도 가장 큰 계명으로 주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임을 우리는 착각치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애정 결핍자이시기에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고,
원하실 뿐만 아니라 계명으로 사랑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은 존재가 곧 사랑이시고,
사랑이 충만하여 결핍이 전혀 없으시며 오히려
그 사랑이 넘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지요.
그러니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 주신 이유는
사랑할 줄도 모르는 것은 물론 왜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우리가
왜 사랑해야하는지를 알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임은 알아도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점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이나 인기나 지식 같은 것들이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는 해도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깨달아야하고, 그리고 깨달은 대로 실천해야 할 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는 사랑이 돈보다 내 행복을 위해 중요하다는 걸 알고,
그래서 사랑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요원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더 내가 감각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무엇보다 하느님 다음으로 선인 인간이 감각적으로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감수성이 아직 없을 때
이런 좋은 것들이 감각적으로 가까이 있기에 하느님은 요원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하느님 사랑 대신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감수성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이게 참 사랑의 관건인데
오늘은 이만 하고, 이것은 다음 기회에 얘기하는 것으로 미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