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은 문, 그것도 하늘나라의 문을 잠그는 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그저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우리 인간이 잠글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나도?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하늘의 문을 잠그는 것입니까?
노상 사랑 타령을 하는 것 같지만 또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당연히 하늘나라도 사랑의 나라일 테니
하늘나라의 문은 사랑으로만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동문으로 치면 하늘나라의 감응장치는
사랑에만 작동이 되게끔 되어있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 안에 사랑 대신 미움이 가득하면
하늘나라의 문은 꿈쩍도 하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미움이 있고 사랑이 없는 경우는 그래도 가능성은 있을 것입니다.
미움 때문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그 괴로움 때문에라도 사랑하려고 할지 모르니까요.
사실 누구를 미워하면 미움 받는 사람이 더 괴롭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이 더 괴로운 법입니다.
우리 사는 경우 흔히 보게 되는 것이
나는 누가 미워서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으며 괴로워하는데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자기가 미움 받는지도 모르고 천하태평입니다.
제 생각에 사랑도 그렇고 미움도 그런데 둘 다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가 사랑을 줘도 상대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대방은 그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되잖아요?
미움도 마찬가지여서 본인이 받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미워해도 그는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정작 그 사람은 미움 받는 자의 괴로움을 모를 겁니다.
그러기에 사랑도 사랑 받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가 행복하고,
미움도 미움 받는 자보다 미워하는 자가 더 괴롭습니다.
여기에 미움의 가능성, 미움의 회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문제는 사랑 대신 미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미움도 없는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사랑이 없는 것이요, 사랑이 전혀 없는 거지요.
미움은 불순물이 있는 사랑이기에 그래도 사랑이 얼마간 있지만
무관심은 사랑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긴 하지만 무관심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보다
미움을 거부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미움의 고통이 싫기에 미워하지 않으려고 무관심 하는 겁니다.
무관심 하면 세상 편합니다.
그런데 무관심은 세상에서 편하지만
문제는 하늘나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편한데 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하늘나라에 관심을 둡니까?
하늘나라 언저리에도 가지 않으니 하늘나라 문은 두드리지도 않겠고
당연히 열리지도 않겠지요?
무관심도 큰 죄가되는것 으로 보이네요
주님저희를 무관심의 구렁에서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