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계속해서 슬기로움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제는 슬기로운 종의 얘기였고 오늘은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런데 같은 슬기로움에 대한 비유이지만 어제 말씀드린 대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슬기로운 종과
사랑의 관계에서 슬기로운 처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슬기로움의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종의 슬기로움은 잔머리를 굴리고 약삭빠른 슬기로움이 아니라
성실하고, 어떻게 보면 우직한 것이 슬기롭다는 느낌이 있지만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의 슬기로움은 신랑에게 민감한 슬기로움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은 맡겨진 일을 주인이 있건 없건 성실히 하는
일적인 면에서의 슬기로움이라면
처녀는 신랑과의 관계에 민감한 인격적인 슬기로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오늘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다른 처녀들에 대한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 번역을 보면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라고 번역되었는데
개신교의 번역을 보면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라고 번역되어 있지요.
저는 개신교의 미련한 처녀가 더 맞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음은 일반적이고 넓은 의미이지만
미련함은 어리석음 중에서 조금 특별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에이 이 미련곰탱아!’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련함은 둔하고 민감하지 못한 것, 한 마디로 둔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비교되는 슬기로움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우선 신랑, 곧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것입니다.
신랑의 동정, 움직임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이며,
신랑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신랑이 뭘 좋아하는지 등을 잘 아는 것입니다.
실로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면 말이 됩니까?
사랑한다면서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말이 됩니까?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는 그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고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면 어찌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신랑을 잘 보필하는 것인데
잘 보필하는 것의 첫째는 신랑을 곁에서 잘 수행하는 것이고,
다음은 신랑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놓는 것이겠지요.
저만 해도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은 제가 뭘 좋아하는지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계시고 그래서 어디를 가든 제가 가면 그것이 준비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슬기로움이고, 슬기로운 사랑입니다.
그에 비해 저는 그분들이 뭘 좋아하고, 어떤 처지에 계신지 잘 모르며
심지어 이름도 잘 기억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그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그러나 이런 저이기에
저는 사랑하면서도 미련하고, 저의 사랑은 미련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이 없겠지만
혹시나 인간에게는 슬기로운 사랑을 잘 하는데
유독 주님께만은 미련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