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제 생각에 악하고 게으른 종은 틀림없이 억울할 것입니다.
자기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고, 적어도
혹 게을렀는지는 몰라도 악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종이 한 것은 돈을 그저 땅에 묻어둔 것뿐입니다.
돈을 가지고 부지런히 뭔가 하지 않았으니 게을렀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가 악한 짓을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돈을 가지고 사기를 쳤습니까?
그 돈을 가지고 고리대금업을 했습니까?
아니면 무슨 다른 폭력이라도 행사 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악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종이 게으를 뿐 아니라 악하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악의 기준은 인간에게 악행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무엇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그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악은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칼을 주셨는데 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찌르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악이지만 남을 찌르지 않았어도
칼을 가지고 반찬도 만들고 수술도 해주라는 것을 안 해도 악이라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을 가지고 악을 행하면 말할 것도 없이 악이지만
선을 가지고 선을 행하지 않아도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갖가지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돈을 주셨는데 좋게 쓰지 않으면 악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목소리를 주셨는데 좋은 데 쓰지 않으면 악입니다.
하느님께서 시간을 주셨는데 좋은 일에 시간을 쓰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는데 왜 그 선을 쓰지 않을까?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악만 주셨지 선은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주셨어도 적게 주셨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고등학생 때 저는 처음으로 오르간이라는 것을 접했고,
합창이라는 것과 합창대라는 것도 그때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처음 접하고 난 뒤 제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저는 그저 음악에 홀딱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남의 곡을 내가 부르고 연주하는 것보다
내가 작곡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작곡을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작곡한 것 대부분이
다른 것과 비슷하거나 독창적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능력이 정말로 보잘것없음에 너무도 실망하여
제가 작곡했던 것들을 다 찢어버리고 작곡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수련 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저의 달란트는 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저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교만 때문에 과소평가하거나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내가 묻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보다 적은 한 달란트이기에 묻어버린 악인처럼
저는 저의 달란트가 모차르트보다 못하였기에 묻어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고약한 경우, 곧 자기에게 달란트가 있음을 알지만
그것을 공동선을 위해 쓸 마음이 없고, 사랑이 없는 경우인데
저든 남이든 귀찮기 때문에 그러는 것을 볼 때면 슬픕니다.
어쨋거나 게으를 뿐인데 악하다고 하시는 주님을 보고
달란트는 있는데 사랑이 없는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