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가운데로 서라.”
주님께서는 오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의미를 부여 한다면
주님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가운데 세우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서 오늘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누구를 일으켜 세우고 누구를 가운데로 세우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저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왕이면 제가 다른 사람을 거꾸러트리는 사람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실제 저를 자세히 그리고 제대로 보면
제가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자기의 약함과 잘못을 인정하며 저의 도움을 요청하면
일으켜 세울 마음이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경우
저는 오히려 그를 거꾸러트리려 하고 거꾸러트리기 위해서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약함 때문에 쓰러지면
제가 도움이 되어 그를 일으켜 세우고 싶어 하지만
겸손치 않고, 특히 제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겉보기와는 달리 사실은 그가 속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인데도
일으켜 세울 마음이 없고 오히려 거꾸러트리려고 하는 겁니다.
언젠가 단체를 같이 하는 친한 사람들이 어디를 갔다 오는데
저도 동승하여 그분들이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먼 거리를 오는 동안 같은 차에 타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얘기 가운데 세우고는 그를 안 좋게 씹는 거였습니다.
그때 그러고 있는 그들을 속으로 비판하면서
저는 뭐가 다른지 봤더니 저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가운데 세우기보다는
비판키 위해 다른 사람을 가운데 세우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가끔 TV에서 아주 비틀어진 관계의 치유를 위해 역할극 하는 것을 보면
아주 문제가 있는 사람도 그 사람을 중심으로 세우고 바라보면
다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부자든 가난하든,
권력자든 힘없는 사람이든 가운데 선 사람, 중심인물이 아니고,
적어도 오늘 주님께서 가운데 세우신 손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우리가 가운데 세운 중심인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저는 제가 가운데 있고 자기중심적이기에
다른 사람을 어쩌면 한 번도 가운데 세우지 않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누구도
가운데 세워본 적이 없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느님까지도 가운데 세워드린 적이 없는 자.
가운데 제가 딱 서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권고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웃 안에 있는 연약함을 보고,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을 때
그 이웃에게 부축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를 부축해 주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가운데 세우면 그의 안에 있는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연약함을 우리가 보게 되면
겉보기에 약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