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나는 죄인들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음식을 한 번에 꿀꺽 삼키지 않고 찬찬히 씹어 삼키듯
은근한 녹차를 한숨에 들이키지 않고 입안에 돌려 음미하며 마시듯
이 말씀들을 복음의 비유와 함께 잘게 썰어 묵상코자 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말부터 보겠습니다.
보통 이 말은 두 가지 경우에 할 것입니다.
자기가 자비를 받은 것에 대해 부정하던 사람이 인정하는 경우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셨다고 인정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정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나는 그 자비를 햇살을 온 몸으로 느끼듯이 느끼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하느님의 자비를 건성으로 고백합니다.
그래 하느님은 자비하시지! 자비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아니지!
그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셨겠지! 뭐 이런 식입니다.
지금은 가을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많이 높아졌고, 바람은 선선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 하늘이 많이 높아졌고 바람이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해!’
이렇게 제가 얘기를 하면 ‘그래 가을 하늘은 높고 아침저녁은 선선하지’
이렇게 누가 대답을 한다면 그는 높아진 하늘을 실제로 쳐다보고
선선한 바람을 실제로 밖에 나가 몸으로 느껴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로 그렇다고 얘기하는 것이며, 이것이 건성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자비를 실제로 느끼고
어떤 사람은 자비를 못 느끼고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는 걸까요?
내가 자비를 받고 있음을 느끼면 참으로 행복할 텐데 왜 못 느끼는 걸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려면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비란 죄인에게 주어지는 사랑이요 은총이지요.
연인을 향한 사랑을 자비라고 하지 않잖아요?
또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비를 못 느끼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종처럼 충실히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한 큰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지 않지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에
품꾼으로라도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큰 자비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습니다. 자비를 느끼려면 하느님 사랑 받기에
자기가 얼마나 부당한 죄인이고, 큰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자기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았다고 한 다음
자기는 죄인들 중에서 첫째가는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진정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이겠습니까?
분명 그렇지 않지만 자비를 받는 사람은 다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언표를 바로 이어서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햇빛을 사랑으로 쬐고 비를 은총으로 맞는 사람은 자신이
악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선한 사람, 죄인임을 인정하는 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음과 같이 오늘의 가르침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죄 때문에 자비가 되고,
자비는 죄 때문에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