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백성사의 거부 (1879)
작가 : 일리야 레핀 (Llya Repin : 1844-1930)
크기 : 캠퍼스 유채 48 X 59cm
소재지 :러시아 모스코바 트라야코프(Tretyakov) 미술관
작가는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레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국민들이 국보로 생각하는 19세기말 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였다. 가난한 직업군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나코프라는 성상화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863년에 당시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일 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한 후 1864년에 황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의 특출한 자격이 인정받아 장학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면서 유럽의 예술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는데 관심을 갖고 작품 활동을 했으며, 수많은 동시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들을 그렸다.
그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초를 연 선구적인 작가이다. 리얼리즘(realism)은 낭만주의의 반대로 이상과 공상 또는 주관을 배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 재현하려고 하는 예술의 경향과 태도를 말한다.
특히 그는 성화, 역사화 분야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련의 공통점은 세밀한 표정의 묘사와, 찰나의 순간을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다.
작가가 활동하던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의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대단한 변혁을 요구하던 시대였기에 작가는 모든 현상에 대해 우호적이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자기의 견해 표현에 과감했기에 작품성에 있어 자기의 주관을 명백히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가 활동한 시기는 제정 러시아 말기였고 폭정에 의해 국민들의 삶이 비참하던 시기였다. 사상적으로 이런 체제를 지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베리아 유형을 각오해야 할 대낮의 공포정치가 일상이 된 현실이었다.
1877년부터 작가는 고향을 떠나 자유로운 지식인들이 모여 사는 모스코바로 이사해서 톨스토이(Tolstoy), 무소르스키(Mussorgsky), 트레야코프 (Tretyakov)와 같은 당대 자유주의 경향이 있던 지식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제정 러시아 치하의 폐쇄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상적인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키우게 되었다.
감옥이나 구치소로 보이는 방에 러시아 정교회의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죄수를 바라보고 있다. 전체의 방 분위기가 어두운 색깔이며 고백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들어온 사제 역시 어두운 등판이 보이고 얼굴은 반쯤 가려진 표정으로 구치인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며 고백을 권하고 있다.
오래 동안의 고문이나 구금에 시달린 것 같은 죄수의 표정 역시 더없이 처참하고 초라한 편이나 표정하나는 의연하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범죄자가 아니라 고귀한 자기 양심과 신념을 표시하다가 정치권력에 의해 체포된 양심수이기에 자기 결백에 대한 대단한 확신이 있다. 그러기에 자기의 고백을 듣기 위해 들어온 성직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도대체 당신이 뭐라고 나의 죄의 고백을 듣고 용서하겠다는 것이요. 그가 고백을 권하는 것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 아니라 불의한 정치체제를 인정하고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심수를 종교적인 죄인으로 먼저 단죄함으로서 정치라는 악의 집단에 손을 들어주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많은 종교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한 국가 종교가 될 만큼 다수 세력이 되었을 때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치와 손잡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이가 되었다.
국가는 교회에 어떤 특혜와 함께 성직자들의 위상을 지켜주고, 교회 특히 성직자들은 국가의 불의와 부정을 눈감아 주고, 신자들에게는 순종의 미덕을 강조함으로서 독재 체제의 간접 협조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관계가 되면 국가는 더 없이 포악해지고 부패하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은 타락하여 러시아 공산 혁명에서 레닌(Lenin) 이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한 것이 바로 현실이 되었다.
이 죄수는 소위 양심수의 모습으로 자기 행동은 확신에 의한 것이니 어떤 인간적인 제도나 조직에 굴복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상징인 십자가를 들고 있는 이 사제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탈을 쓴 인간 조직의 한 조직원에 불과하다고 여기기에 고백 성사라는 것 역시 양심의 변절행위이기에 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고 있다.
하느님 안에서 양심이 자유로운 인간의 의연한 모습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정치의 역기능만이 아니라 타락한 정치 체제를 비호하면서 신자라는 이름의 국민들의 정상적인 판단을 마비시키는 종교의 어두운 기능을 고발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에는 약 11만 정도의 성직자들과 10만명에 가까운 남녀 수도자들이 있었는데, 소수의 의식 있는 성직자 수도자들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선량한 백성들에게 고통을 더해주고 있는 왕정체제의 수호자로서 일반 인민들이 땀흘려 얻은 것을 빼앗아 살아가는 위선자들의 집단 성격을 띄고 있었다.
후에 러시아 공산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처벌받은 것이 이런 성직자 수도자였다는 것이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처럼 무신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민의 의식계발을 종교의 이름으로 억압하고 인민들이 땀흘린 것을 갈취하여 살아가는 기생충과 같은 집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민들을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선 신자라는 이름의 국민들을 의식계발해서 종교와 성직자들의 횡포와 억압에서 해방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표정 처리를 통해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람자들이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심리 표현에 있어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했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 대한 뛰어난 이해를 바탕으로 진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런 표현을 했다. “아름다움은 취미의 문제이며 나에게 아름다움은 진실의 표현에 있다.”
하느님은 진선미의 근원이시며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인데, 작가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아름다움을 진리 표현의 좋은 수단으로 제시한 것은 현대에 있어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화두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대형 종교 역시 러시아의 현실이 생경스럽지 않는 닮은 꼴이 많은 처지이다. 뜻있는 사람들이 말하길 “이제 우리는 종교가 세상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야 할 때”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생각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