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 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제자들에게 당부를 하시는데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그런데 벗이라고 부르시는 것에 포함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적대감을 보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달리 친밀감을 보이신 것뿐일까요?
그런 면이 없지 않고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대치전선을 형성하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분명히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벗이라고 부르신 것에는 친밀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의 벗이라는 존재의 수여이자 역할의 부여이고
당신의 벗인 존재로서 벗답게 처신하라는 지엄한 당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는 개인도 아니고 상하관계의 제자도 아닌
당신의 벗인 존재라고 엄숙하고 장엄하게 선언하시는 것이며
개인적으로 주님과 친밀할 뿐 아니라
공적으로 주님의 벗답게 처신하라는 권고와 당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벗인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친밀감을 가져야 하고,
세상 친구들과 친밀하기보다 주님과 더 친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공적인 차원이 있고,
그러므로 주님의 벗으로서 공적인 처신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맞선 보는 자리에 누가 제 친구라고 왔는데
저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깎아내리는 친구라면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친구를 보면 된다고까지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벗이라면 한 개인으로 처신하거나
가볍게 깝죽대서는 안 되고 늘 나는 주님의 벗임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주님의 벗답지 않고, 어떤 것은 벗다운 처신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바리사이의 위선이고 그러므로 그 위선을 조심하는 겁니다.
사실 주님의 벗답지 않은 것이 위선 말고도 미움, 교만, 우상숭배 등
많고도 많지만 여기서는 바리사이와의 관계에서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바리사이처럼 위선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처럼 위선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
사실은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 자기 자신에게 성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위선을 조심하는 것과 자신에게 진실한 것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벗답게 살면 우리가 위선을 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위선을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벗이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권력자를 두려워할 때는 딱 한 가지입니다.
권력자 앞에 나 혼자 있을 때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권력자 앞에 있으면 우리는 두렵고,
더욱이 혼자 있으면 힘없는 내가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의 벗이라며 쫄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용기를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귀히 여기시는데
우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한 당신의 벗이기에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작 참새보다 더 귀한 존재냐고
오해할 것이 아니라 참새도 귀히 여기시는데 그보다 몇 만 배 귀한 우리는
주님께서 더더더더더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으로 고맙게 이해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