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부활이 없다고 그들은 주장할까 저는 생각이 듭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가끔 제가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화내지 않았는데 제가 그분에게 화를 냈다고 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데 제가 당신을 미워한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는데 제가 그랬다고 박박 우기면
제가 당신을 미워하고 화를 낸 것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지요.
좋은 쪽으로 생각지 않고 늘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 아니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 생각해보면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고착화된 것이고
의심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게 되지요.
그들은 왜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의심이 고착화되었을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장과정에서
부정적인 경험이 축적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랑 받아본 적이 거의 없고 미움만 받은 사람,
어렸을 때부터 집안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에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경우입니다.
자기 이외의 사람은 다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아는 것 이외에는 다 의심을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늘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왜 이 모양이냐고 꼬투리를 잡고 타박 하지요.
자기가 문제이고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고
늘 남이 문제이고 남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지 않고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은 알려고도 않고 부정해버립니다.
그래서 현실문제든 신앙문제든 자기가 얘기한 것을 듣고 난 뒤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어서 얘기할라치면
‘그건 됐고!’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고!’ 뭐 이런 식으로 묵살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두가이의 경우에는 이런 교만에 더하여
무진장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들이고,
그래서 일종의 영적 장애자들이지요.
이 세상에 너무도 집착하여
이 세상 너머의 세계는 아예 상상조차 못합니다.
이승과 저승을 모두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부정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요.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삶
이 세상의 모든 관계를 초월하는 삶은
알 수도 없고 그래서 인정할 수도 없는
그런 장애가 나에게도 살짝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성찰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