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입니다.
그런데 이 성인의 축일을 왜 대축일로 지내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고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성 프란치스코보다 더 위대하기에 대축일로 지내는 거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성인이 다른 성인들보다 위대하거나
대축일로 지내는 성베드로, 바오로와 같이 위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교의 주보성인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축일을 통하여
교회의 선교성소와 신자들의 선교사명을 북돋우기 위해서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성소와 선교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고,
선교는 교회의 본질인데 종종 왜 선교를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고,
심지어는 저희 형제들, 다시 말해서 수도자들 가운데서도
왜 중국선교를 꼭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물론 중국 신자들도 그리 원하지 않고
그래서 비자 문제나 감시와 억압 때문에 어려움도 많은데
왜 선교를 해야 하냐고 묻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왜 선교를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선교가 우리의 의무이고 사명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 복음 선포의 의무는 우선 자기 행복에서 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행복을 전하지 않는다면 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고,
행복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행복이 복음 때문이 아닌 거지요.
정말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을 보면
자기만 행복한 것 때문에 신나는 게 아니라 미안하고 심지어 죄스럽습니다.
하여 누가 강요치 않아도 자기 행복에 대한 내 안의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자기의 행복비결을 행복치 않거나 불행한 사람에게 전하도록 강제할 것이고,
복음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기 내적 이유라면 자기 외적 이유도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말씀하시고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인데
주님께서 오늘 복음의 제자들에게처럼 바로 내 앞에 서시어
“내가 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나의 복음을 전해다오.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꼭 전해다오”라고 하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부담스러워 거절하시겠습니까?
나를 그런 그릇으로 여겨주심에 감사하여 끽소리 못하고 ‘예’ 하겠습니까?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 하느님을 전혀 사랑치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면전의 주님께서 직접 부탁하시는 사명을 거절하겠습니까?
더욱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고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주님의 명령을 거절하겠습니까?
결국 사랑과 직접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직접성을 살고 있다면
설사 박해자가 배교를 하라고 하여도 순교하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선교의 어려움이나 위험 때문에 가지 말라고 누가 말리면 그러니까
내가 가야만 하고, 다른 사람이 못하니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저희의 몇몇 형제들은 그래서 그런 곳에 나가 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