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길지만 성주간을 시작하며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서, 성주간 첫째 날입니다.
우리는 성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지상 생활의 마지막 한 주 동안에 이룩하신 구원의 신비를 경축합니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두 가지의 복음 말씀을 듣습니다.
이 두 가지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단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극적인,
그리고 상반되는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인파의 환호 속에
영광의 임금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바로 이 사람들의 모욕과 질시, 험담 속에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상반된 사건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개선 행렬이기보다는
십자가 죽음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하던
같은 군중들은 어느새,
'바라빠를 놓아주고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군중들이 생각했던 평화와 영광은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자신의 평화,
즉 권력과 이기심과 탐욕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지탱되는
거짓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정의와 평등에 기초한 참 평화를 주러오신,
참 평화 자체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군중들은 서로 먹고 먹힘으로써 상처만이 가득한 자신들의 헛된 영광을 위해
나눔과 섬김으로써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영광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소란스러운 군중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당신의 길, 십자가 수난의 길,
죽음으로써만 가능한 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즐기는 무리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서럽게 목놓아 우는 사람들,
생사고락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등진 제자들이
이 길에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합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나눠서 지기 위해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못질을 하기 위해 망치를 들고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야 십자가를 지던 말던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다가 행여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힐까봐 두려워서
멀리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길에 함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느냐?'>라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부터 드디어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성주간의 전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복음도 예수님의 수난사화(受難死話)이며,
고통의 길을 험난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들을 이끌어 줍니다.
3년마다 복음사가가 바뀌는데
금년은 마태오 복음에 의한 수난사화입니다.
마태오에 의한 수난사화는 그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주의 깊게 그 내용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는 가능한 한 예수님의 고통과 절망의 어두움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잡다한 곁가지 내용은 잘라 버립니다.
예를 들면,
루가의 수난사화에는 예수님께서 부인들을 위로하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자들을 용서하시기도 하시고,
같이 달렸던 도둑 중의 한 명에게 구원을 보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루가는 용서와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마태오는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 고통을 주는 사건만으로 수난사화를 통일하고 있습니다.
그 수난사화에 등장해서 예수님을 짖누르는 사람들의 악의(惡意)에 관해서는
다른 복음서보다도 철저하고 깊습니다.
유다는 대사제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데,
배반의 대가로 돈을 받는 유다의 악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급하니깐 예수님을 거부해 버립니다.
생존본능 때문에 사랑하는 스승이나 친구를 배반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의리가 없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사제들과 장로들의 고약한 심보도 마태오에서는 유난히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을 판 대가로 은화를 받았던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돈을 돌려주려고 찾아갔지만,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쫓아버리기도 하고,
뒤에서 군중을 선동합니다.
권력과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악랄한 짓도 서슴치 않는
인간의 추한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해서,
무력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감각을 가진 빌라도와
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군중이 더욱 한통속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마태오의 수난사화에서는
인간의 추한 욕망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상처받고,
고통에 짖눌려, 죽음을 당하려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 있는 추한 욕망과 죄가
예수님을 덮쳐 버립니다.
상처받고, 고통에 짖눌려 있는 예수님을
그 누구도 위로하거나 도와주려는 자가 없고,
예수님은 고통과 고독의 어두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셨습니다.
고통과 고독은 예수님의 뼈 속 깊이 파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도움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을 체험하시며 외치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똑같은 부르짖음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상처받으시고, 배신당하시고, 버림받으시며,
하느님의 도움은 한치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태에서
예수님은 생애를 마치십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뇌(苦惱)의 절정을 감수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고통의 생애를 보내셨다는 것,
우리들을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시어
고통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
그것은 분명히 놀랄 수밖에 없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고통과 괴로움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설레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은총을 받고 희망이 주어지는 뒷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뿐입니다.
성주간의 전례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 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각인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나의 삶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해야할 것입니다. 아멘.
* 은혜 넘치는 성주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서, 성주간 첫째 날입니다.
우리는 성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지상 생활의 마지막 한 주 동안에 이룩하신 구원의 신비를 경축합니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두 가지의 복음 말씀을 듣습니다.
이 두 가지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단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극적인,
그리고 상반되는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인파의 환호 속에
영광의 임금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바로 이 사람들의 모욕과 질시, 험담 속에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상반된 사건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개선 행렬이기보다는
십자가 죽음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하던
같은 군중들은 어느새,
'바라빠를 놓아주고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군중들이 생각했던 평화와 영광은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자신의 평화,
즉 권력과 이기심과 탐욕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지탱되는
거짓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정의와 평등에 기초한 참 평화를 주러오신,
참 평화 자체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군중들은 서로 먹고 먹힘으로써 상처만이 가득한 자신들의 헛된 영광을 위해
나눔과 섬김으로써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영광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소란스러운 군중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당신의 길, 십자가 수난의 길,
죽음으로써만 가능한 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즐기는 무리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서럽게 목놓아 우는 사람들,
생사고락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등진 제자들이
이 길에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합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나눠서 지기 위해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못질을 하기 위해 망치를 들고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야 십자가를 지던 말던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다가 행여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힐까봐 두려워서
멀리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길에 함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느냐?'>라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부터 드디어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성주간의 전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복음도 예수님의 수난사화(受難死話)이며,
고통의 길을 험난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들을 이끌어 줍니다.
3년마다 복음사가가 바뀌는데
금년은 마태오 복음에 의한 수난사화입니다.
마태오에 의한 수난사화는 그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주의 깊게 그 내용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는 가능한 한 예수님의 고통과 절망의 어두움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잡다한 곁가지 내용은 잘라 버립니다.
예를 들면,
루가의 수난사화에는 예수님께서 부인들을 위로하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자들을 용서하시기도 하시고,
같이 달렸던 도둑 중의 한 명에게 구원을 보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루가는 용서와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마태오는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 고통을 주는 사건만으로 수난사화를 통일하고 있습니다.
그 수난사화에 등장해서 예수님을 짖누르는 사람들의 악의(惡意)에 관해서는
다른 복음서보다도 철저하고 깊습니다.
유다는 대사제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데,
배반의 대가로 돈을 받는 유다의 악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급하니깐 예수님을 거부해 버립니다.
생존본능 때문에 사랑하는 스승이나 친구를 배반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의리가 없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사제들과 장로들의 고약한 심보도 마태오에서는 유난히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을 판 대가로 은화를 받았던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돈을 돌려주려고 찾아갔지만,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쫓아버리기도 하고,
뒤에서 군중을 선동합니다.
권력과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악랄한 짓도 서슴치 않는
인간의 추한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해서,
무력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감각을 가진 빌라도와
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군중이 더욱 한통속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마태오의 수난사화에서는
인간의 추한 욕망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상처받고,
고통에 짖눌려, 죽음을 당하려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 있는 추한 욕망과 죄가
예수님을 덮쳐 버립니다.
상처받고, 고통에 짖눌려 있는 예수님을
그 누구도 위로하거나 도와주려는 자가 없고,
예수님은 고통과 고독의 어두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셨습니다.
고통과 고독은 예수님의 뼈 속 깊이 파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도움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을 체험하시며 외치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똑같은 부르짖음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상처받으시고, 배신당하시고, 버림받으시며,
하느님의 도움은 한치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태에서
예수님은 생애를 마치십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뇌(苦惱)의 절정을 감수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고통의 생애를 보내셨다는 것,
우리들을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시어
고통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
그것은 분명히 놀랄 수밖에 없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고통과 괴로움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설레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은총을 받고 희망이 주어지는 뒷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뿐입니다.
성주간의 전례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 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각인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나의 삶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해야할 것입니다. 아멘.
* 은혜 넘치는 성주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같이 걸어서 그런가 봅니다.
그 분의 사랑앞에서 누가 이길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처음처럼 돌아 가고 싶습니다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아지리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관구장님
연민의 눈길을 주시는 주님!!!!
저는 베로니카성녀가 되고 싶습니다.
피땀흘리시는 주님께 흰 수건을 드리겠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며 많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빠스카의 신비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새롭게 깨닫는 한주간되기를 구하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