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새겨 들여야 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자녀.
이제 하느님의 자녀.
제 생각에 이 표현들 안에는 이런 뜻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인간치고 하느님의 자녀 아닌 자가 없이 다 하느님의 자녀지요.
그리고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도 많고 많지만
무늬만 하느님의 자녀지
과연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무늬만 하느님의 자녀와 실제로 하느님의 자녀의 차이는 뭘까요?
제 생각에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했다는 오늘 요한의 편지를 보면
하느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의 복음이나 편지를 보면 아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서 아는 것은 알아보는 것,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껍데기를 아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던 속을 알게 됨으로서 진면목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함이지요.
박근혜 대통령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고,
그런데 이제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고 할 때처럼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오늘 세례자 요한도 두 번이나 예수님을 몰랐다고 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몰랐다고 할 때는
나도 하느님 모르니 세상처럼 형편없는 자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데
세례자 요한도 몰랐다고 하니 걱정이 좀 줄어들고 위로도 받습니다.
저 위대한 세례자 요한도 모르니 내가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요한처럼 저도 하느님을 알아보게 되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을 알게 되면 되는데
이에 대해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받으면 된다고 얘기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지요. 세례를 받건 받지 않건 다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세례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를 낳으신 아버지임을 알고 믿는 자이고,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계속 부정하는 자이지요.
사실 세상은 그저 하느님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아 모르고,
세례자 요한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지만
세상사에 빠져 보려고 하지 않아 알아보지 못하는 거고, 그것이 죄이지요.
이렇게 세상에 빠져 하느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짓겠다던 자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하고 죄를 씻는 것이 물의 세례이고,
이렇게 물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 과연 하느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오늘 자신의 세례를 물의 세례라고 하고
주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물의 세례는 모르던 주님을 알게 하는 세례라면
성령의 세례는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하는 세례이고
물의 세례는 자기의 죄를 씻는 정화의 세례라면
성령의 세례는 하느님의 어린 양처럼
세상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봉헌의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