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품고 있는 의미가 참으로 많고 풍성한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어야 하는지,
우리의 공동체가 어떤 신앙 공동체이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복음입니다.
먼저 우리의 신앙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고, 믿음의 공동체라고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매우 인간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것에 그칩니다.
우리는 사랑이 부족하기에 사랑하려고 근근이 애를 쓰고 있는 형편이니
휴머니즘적인 사랑이라도 잘 한다면 훌륭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 따로 믿음 따로>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 그저 인간적으로 사랑하려는 거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주님께 데리고 오는데
지붕을 뚫고서라도 데려올 정도로 그 사랑과 열정이 대단합니다.
그러니 그러지 못한 우리는 그들의 대단한 사랑과 열성에 감탄을 하고
칭찬을 하는데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 아니라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왜 그들의 사랑이 아니라 믿음을 칭찬하시는 것일까요?
그들의 사랑과 열성은 대단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들의 사랑과 열성도 중요하지만
다만 그들의 사랑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고
사랑만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까지 칭찬하는 것이요,
중풍병자를 꼭 치유해주실 주님 사랑에 대한 믿음까지 칭찬하고
자기들의 사랑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이 중풍병자에 더 필요하고
더 유효하다는 믿음까지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중에 누가 심신(몸과 마음)이 아프면
내가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도 해야겠지만
오늘 복음의 네 사람처럼 믿음을 가지고 그를 주님께로 데려가고
주님께서 그를 치유해주시도록 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큰 사랑이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어느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비의 실천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그를 주님께 이끌기 위해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이런 형제들에게 늘 자비를 베푸십시오.”
다음으로 우리는 심신이 치유뿐 아니라
영혼도 치유하는 공동체여야 함을 보겠습니다.
용서는 영혼을 치유하는 것인데
용서는 하느님만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며
하느님께 미루고 우리가 해야 할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당신이나 하슈! 그것은 내가 알바 아니오.’라는 식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요.
그래서 전에 어떤 분이 이에 대해 저에게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듯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게 해달라고
청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틀린 생각이 아니고 하느님의 용서를 우리가 물론 본받아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주님께서 우리가 용서하듯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하라 가르치시고
오늘 용서의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아들인 당신에게 용서의 권한이 있듯
사람의 아들인 우리도 용서의 권한과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만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하시는 거라고 믿던 당시 사람들에겐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놀랍고 새로운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을, 주님이 가져다 준 이 선물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부터는 <용서는 하느님이, 치유는 내가!>가 아니라
<용서는 내가, 치유는 하느님이!>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