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나 루카 복음과 달리 일반 사람들이
단식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봐온 것, 곧
바리사이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철저히 단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치 않느냐는 의문이 들은 것이지요.
왜 단식치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직답하지 않고
왜 단식해야 하는지, 어떤 단식을 해야 하는지 답을 하십니다.
왜 단식을 해야 하는가요?
단식은 꼭 해야 하는 것인가요?
우리는 우선 이 질문부터 해야 하고
예수님께서도 이런 차원에서 답을 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단식은 건강이나 몸매를 위해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정신을 다잡기 위하여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 정의를 위하여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다른 이유로 단식을 하지만
사실은 다 한 가지 이유 곧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어야 의미가 있는 단식이라 할 수 있겠지요.
건강이나 몸매를 위한 것이나 자기목적 성취를 위한 것이나
자기정신을 가다듬기 위한 것이 자기 사랑이라면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은 이웃사랑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지요.
아무튼 모름지기 모든 단식은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런데 주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의 단식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자기사랑 때문에 하는 것보다는 이웃사랑 때문에 하는 게 더 숭고하듯
어떤 사랑보다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더 숭고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가장 숭고하다는 말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은 높낮이가 다르고,
하느님사랑이 인간사랑보다 더 고귀하다는 그런 위계적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사랑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차원
하느님을 사랑할 때 모두를 사랑하는 거라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지요.
이런 차원의 단식을 당시 사람들은 알 턱이 없는 것이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새로운 것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런 새로운 가르침을 담을 수 있으려면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고루한 사고의 틀을 가지고서는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도저히 그리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틀에 박힌 생각을 한다거나
틀에 박힌 삶을 산다고 할 때 그 뜻이 그리 좋은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틀이 고루하다고 하면 더더욱 나쁜 뜻이 되겠지요.
그것은 마치 전혀 새로운 옷감이 나왔는데
아주 구식 재봉틀을 가지고 재봉질을 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법 안에 가두고,
하느님과 사람을 법 안에 가두려는
그 구식 틀은 깨고 신식이 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