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성탄에 만든 구유
이 구유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멀리서도 눈에 쉽게 띈다. 왜냐하면 실물 크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의 육화의 신비를 묵상하며 구유를 만들었던 그 마음으로 구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어떤 조각상으로 구유를 꾸민 것이 아니라 진짜 구유를 만들고 싶어했고 구유를 만들었다.
첼라노 전기 1생애 1부 30장을 보면 첼라노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끊임없이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겼고, 예리한 사고력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되새겼다. 육화(肉化)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 특히 그를 사로잡았으므로 그는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광스러운 죽음이 있기 3년 전, 작은 마을 그레치오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날에 그가 한 일은 기억할 만한 것이고, 경건하게 기억을 되살려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평판도 좋았지만 또한 평판이상으로 착한 생활을 하였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그를 특별히 사랑했던 까닭은 그가 그 고장에서 덕망 있고 영예로운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또 그가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영혼의 고귀함을 추구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그를 불러 일을 자주 시켰다. 이번에도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성탄 약 15일 전에 그를 불러 말했다. “그레치오에서 우리 주님의 축제를 지내고 싶으면, 빨리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준비하시오. 우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겪은 그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 그리고 소와 당나귀를 옆에 두고 어떤 모양으로 짚북더기 위에 누워 있었는지를 나의 눈으로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착하고 믿음 있는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성인이 말씀하신 자리에 성인께서 분부하신 대로 모두 준비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른 구유와 달리 구유에 프란치스코 성인을 배치시켰다. 아기 예수님 앞에서 육화의 겸손과 사랑을 묵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어떻게 구유를 꾸밀지 의논하면서 예쁘고, 잘 정돈되고, 아름답게 꾸며진 구유가 아니라 정말로 예수님이 오셨던 그 더럽고, 냄새나고 하는 것들을 있는그대로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낙엽이랑, 짚이 바닥에 깔려 있다.
이 말구유는 우선 전적으로 성북동 수도자들의 열성으로 영글어진 작품이다
백화점이나 화원에서 사온 재료를 조립(?) 한 것이 아니라 여러 형제들이 머리를 맞대고 제작한 것이다.
입고 있던 수도복을 벗어 프란치스코 사부님과 요셉 아버님에게 입혀 만들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프란치스코의 얼굴은 감동와 기쁨이 충만한 모습이다
요셉 아버지 역시 젊은 폐기가 충만한 모습이다
아기 예수님을 잘 키우겠단 대단한 결의가 얼굴에 드러나고 있다.
전통적인 말구유의 성 요셉은 성모님의 동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 복덕방 영감(?) 같이 무기력한 모습인데 , 이 밀구유의 성 요셉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묵시중에 만난 것처럼 더 없이 늠늠하고 멋진 젊은이로 나타나고 있다.
갖춘 재료를 조립해서 제작되는 말구유들은 스프만 다른 라면 처럼 식상하기 쉬운데 , 이 말구유야 말로 프란치스칸 젊은 수도자들의 심심과 열성으로 만들어진 프란치스칸 다운 걸작(?)이다
대가의 작품이어서 걸작이 아니라 , 열정과 합심의 차원에서 걸작이다.
"와서 보시오." (요한 1: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