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음 주는 승천대축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부활 제 6 주일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시는 주일인데
이 자리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거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떠나지만 대신 다른 보호자가 제자들에게 오실 거라는 얘깁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세상을 비교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셔도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지만
성령을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성령이 그들 안에 머무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제자들의 차이, 세상과 우리의 차이는
성령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이고,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차이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모르고, 모르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세상인데,
그런데 세상은 왜 성령을 모르고, 모른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뜻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알려고 하는데도 아는 것에 실패하여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알려고 들지도 않았고 그래서 성령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영의 세계에 대해서는 애초에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겁니다.
세상이란 것이 본래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란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기에 저 세상인 영의 세계를 알 수 없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살이가 너무도 팍팍하고 이 세상사는 것만도
너무 벅차서 저 영의 세계에 대해서는 여념餘念이 없고
어떤 사람은 이 세상 욕망에 사로잡혀 저 영의 세계에 대해 관심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욕망 중에서도 교만의 충동을 받은
출세욕과 지배욕이 너무도 강하여 저 영의 세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육의 영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육의 영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칭찬받고, 보상받으려 하게 하는 거지요.
프란치스코도 한 때는 이런 육의 영에 이끌려 이 세상 즐거움이나 탐하고,
출세하려고 두 번이나 전쟁터로 나갔지만 주님께서 그를 회개케 하셨지요.
육의 영에 이끌려 그가 하는 것들이 모두 좌절되는 세상의 쓴맛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와 영의 세계에 맛을 들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한 번 맛본 영의 세계를
늘 갈망하기 위해서 한 편으로는 세상 욕구에 대해서는 가난하였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지 않으면
이 기도와 헌신의 영이 주님의 영, 곧 성령을 영접하지만
이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면 우리는 다시 육의 영의 지배를 받고,
그래서 다시 이 세상이 주는 만족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기(영접하기) 위해서
육의 영에 지배를 받는지 기도와 헌신의 영에 지배를 받는지 늘 식별하고,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듯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첫째로 늘 내 안에 어떤 영이 있는지 늘 영의 식별을 하는 것이고,
둘째로 다행히도 내 안에 기도와 헌신의 영이 있다면
이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의 식별과 기도와 헌신의 영의 보존을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실천하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그것은 사순시기의 3대三大실천사항으로서
첫째가 단식/재계이고, 둘째가 기도이며, 셋째가 애덕실천입니다.
단식과 재계는 이 세상에 맛들이지 않도록 욕망을 끊는 것이고,
기도는 우리의 사랑과 지향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것이며,
애덕실천은 하느님 사랑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맛보이는 겁니다.
저를 성찰하면 단식과 재계를 잘 하지 못하면서
기도와 애덕실천을 감히 해보겠다고 덤비지만 결국 제대로 못해내지요.
실천의 의지는 가지되 은총을 주십사고 청하면서 노력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