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조회 수 1190 추천 수 1 댓글 0
매일미사 말씀 보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No Attached Image

성령 강림 대축일-2017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겠지만 저희 수도원에서는 성령강림을 앞두고

준비하는 9일 기도를 합니다.

올해도 9일 기도를 하기 때문인지 그저께 마라톤 연습을 하며

성령강림을 묵상하며 마라톤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성령께서 오셔도

맞을 자격이 내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습니다.

평의회 등 여러 가지 회의와 일들로 다른 해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를 들여다보니 오셔도 모실 자리가 없겠구나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느 집이나 방에 들어가려는데 발 디딜 자리도 마땅치 않아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게 되는데 저의 내적인 상태가

마치 이와 같으니 모셔 들이기 전에 비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신 성령을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합니다.

욕심을 비워야 하고 욕심으로 소유한 것을 비워야 함은 물론

근심걱정을 비롯한 갖가지 복잡한 생각들도 비워야 하고,

미움이나 분노나 시기질투와 같은 악감정들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이런 것들을 비워내는 외적인 표시로 방청소를 했습니다.

빗자루 질과 물걸레질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너절하게 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방에서 빼어내 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비움에 대해 묵상하고 나니 이제 열림에 대해 생각이 미쳤습니다.

방을 깨끗이 치운 것이 성령을 모시기 위함이고 그래서 그도 중요하지만

들어오시도록 나를 여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기껏 청소해놓고 문을 안 열어드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성령이 오시는데 문을 안 열어드리겠습니까?

성령이 오신 것을 알고서도 문을 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문을 열지 않는 사람은 두 부류의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는 성령이 오신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다른 하나는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천상적이고 영적인 것에는 무디고 눈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 너무 관심이 많고 그래서 그런 감각만 발달한 사람이거나

슬기로운 동정녀와 미련한 동정녀에서 미련한 동정녀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말이

눈치를 봐서는 안 되지만 눈치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은 두려움으로 남을 보는 것이지만

눈치가 있는 것은 사랑으로 남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처지와 필요를 사랑으로 읽는 것이 눈치이지요.

 

어제는 전철을 타고 어디를 가는데 70대 노인이 탔습니다.

젊은이들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좀 떨어져 있었지만

제가 가서 제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라고 양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네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한 젊은이가 냉큼

제가 양보한 자리에 가 잽싸게 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히기도 하였지만 어떻게 자기의 필요만 보이고

다른 이의 더 큰 필요는 보이지 않는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곧 두려움 때문에

사랑으로 오신 성령을 악령으로 오해하고 문을 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라보도 놀란 사람이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고,

엄청난 풍랑에 죽게 된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한 것 같이

두려움이 가득 찬 사람은 뭘 봐도 악령으로 생각하고 문을 닫아걸어

결과적으로 성령을 모셔 들일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말하듯 원래는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법인데

두려움이 오히려 사랑이신 성령을 몰아내는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이런 관계입니다.

사랑이 더 크면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지만

두려움이 더 크면 두려움이 사랑을 몰아내지요.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보면 두려움과 사랑은 물과 불처럼 상극이지만

신앙차원으로 올라가면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 두려움을 자기 힘이나

인간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 마침내 하느님의 도움을 찾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만 열린 두려움 안으로 성령이 임하시고 충만케 되면

이제 아무 두려움이 없어 모든 사람에게도 자신을 열게 되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과 성령의 언어로 소통케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소통과 방언의 은사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사는 무엇보다 일치의 은사입니다.

각각의 다양한 은사에도 불구하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은사지요.

 

올해는 성령의 그 많은 은사 중에 소통과 일치의 은사를

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청해봅니다.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말씀 나눔

매일미사 독서와 복음,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글 묵상나눔

  1.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목록
Board Pagination ‹ Prev 1 ... 752 753 754 755 756 757 758 759 760 761 Next ›
/ 76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