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오늘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와 사렙타 과부의 얘기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 왕 한 사람이 우상을 숭배한 것 때문에 가뭄의 재앙을
전체에게 내려 애꿎은 백성이 다 죽게 하신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그렇게 재앙을 겪고 있을 때 엘리야만 시냇가에 한가로이 숨어 지내며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고기와 빵을 먹게 하신 것도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 시내마저 마르자 엘리야를 사렙타 과부에게 가 얹혀살게 하신 거나
그 과부 한 사람만 살리신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그 많은 과부들을 놔두고
하느님께서는 사렙타의 과부만 살리셨다는 얘기를 하시며
인간의 생각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무엇이든 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없음을 말씀하셨지요.
사실 지금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일도 그 일들에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는 게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굶주려죽고 어떤 사람은 너무 먹어죽고.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의 잘 살고 못 살고 때문에 그리 된 거라 생각하면
간단한데 오늘 사렙타 과부 얘기처럼 하느님께서 그리되게 하신 거라면
그 하느님 뜻이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음에 우리는 분노하거나 하느님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겸손해야 하고,
모르지만 하느님의 좋은 뜻을 믿고 자비를 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제가 복음이 아니라 열왕기를 묵상 주제로 삼은 것은
이 주제보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는 방식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면부지의 엘리야에게 선을 베푼 과부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선을 행하는 선한 사람에게만 선을 베푸시는가?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은총을 베푸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뭔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8)
하느님은 선인악인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 선을 베풀고자 하시고,
그래서 하느님이 선을 베푸심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은총이지만
은총의 됫박은 나에게 달린 것입니다.
쪽박이든 됫박이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은총의 됫박이 있기는 하나?
됫박이 있다면 얼마나 큰가?
안 주고 안 받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주기 위해 안 받겠다는 것인지,
원했으나 받은 적 없어 안 받겠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받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줄 것이며,
주고받을 됫박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면,
그리고 누가 나에게 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과 그들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받을 됫박이 없고 줄 마음도 없었기 때문임을 말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은총의 됫박을 생각해 봅니다. 저를 펼치고 늘리는 노력을 하여
더 큰 그릇으로 바꾸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