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의 아주 간략한 부활사건 기술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길게 다뤄지는 얘기를 여기서는 한두 줄로 갈음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사실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두 제자가 자기들이 체험한 것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셨고,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하신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그 완고하고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더 이상 완고하지 않고 확고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완고함은 무엇이고, 확고함은 무엇인지,
제자들은 어떻게 그 완고함에서 확고함으로 바뀌었는지 보게 됩니다.
완고頑固함이나 확고確固함 둘 다 고固자가 들어가는 말이고
그래서 고집과 비슷하게 단단하게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단히 지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무엇을 지키느냐에 따라
완고함과 확고함으로 달라지는데 얼핏 생각해도 완고함은 안 좋은 뜻이지요.
그러니까 완고함은 안 좋은 고집으로서
보편성과 객관성을 잃은 것을 고집한다거나
틀린 것을 고집한다거나 자기를 고집한다거나 하는 것과 같이
바뀌어야 할 것이 아직 안 바뀌고 있을 때 우리는 완고하다고 합니다.
완고함이 이런 것이기에 확고함은 자명합니다.
이것은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이고, 그것을 단단히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집固執하는 것이 아니라 고수固守하는 것이며
자기의 견해나 생각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진리나 믿음을 고수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기에 완고함이 확고함으로 바뀌기 위해서
완고함은 깨져야하는데 그것이 아마 자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깨지는 것이 깨지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겠지요.
예를 들어서 자기가 처참히 깨져서 자존감도 완전히 상실하고,
삶의 의미도 목적도 상실한 채로 그만이라면 안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악의에 의해서 그리된 거라면 더더욱 안 되겠지요.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의해서 자기가 깨지고
그래서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나로 바뀌는 것이어야 하고,
진리와 정의와 사랑도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바뀌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사도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 깨진 것이 바로 성령강림 이후잖아요?
그렇기에 오늘 독서에서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여전히 자기들의 완고함 가운데 머무는 것은 성령체험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들을 통해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도 완고함 때문에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합니다.
사도들의 활동에서 하늘의 표징을 보면서도 사도들의 활동을 막는 것은
그들이 하늘을 보지 않고 땅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늘이 보이는데도 보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땅에서 가진 것이 너무 많으며,
유다의 지도자들이고 원로들이고 백성의 우러름을 받는 자들인데
하늘을 보면 땅을 보지 말아야 하고
땅의 것을 거들떠보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대신 성령을 받았고,
그래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지시에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완고함은 언제 사도들의 이런 확고함으로 바뀌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