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읽고 있는 복음은 요한복음 17장으로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제자들과 이별을 하며 대사제의 기도를 드리는 부분인데
그중에서 오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더듬으면 13장부터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하시며 가르침도 주시고, 유언적인 부탁과 약속을 하시고.
이제 17장에 와서 제자들을 위해 성부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장에서 주님은 체포되고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이 기도를 들으면서 저는 주님께서 하신 기도가
성부께 하는 기도라기보다는 제자들이 들으라고 하신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공동체에서 공동기도 중에 어떤 어른이 소리 내어 기도를 하는데
그것이 주님께 올리는 기도라기보다는 평소 그 공동체 구성원 특히 젊은
회원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기도형식으로 쏟아놓는 경우 말입니다.
이때 같이 기도하던 구성원들은 충고를 하거나 자기요구를 쏟아놓는
그런 기도에 마음이 동하기는커녕 거부감이 강하게 들게 되지요.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기도도 이런 기도일까요?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꼭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의 경우 옛날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주님께 기도하기보다
내가 지금 공동체에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느낀 다음부터는
혼자서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거나 공동기도를 어쩔 수없이 할 경우에는
저의 공동체에 자비를 베푸시라고 하거나 필요한 은총 주시라고
짧게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필요 다 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공동기도를 아주 장엄하고 길게 하십니다.
허지만 주님의 기도는 분명 과거 저의 기도와는 다를 겁니다.
기도형식의 충고와 요구가 아니라 축복의 기도일 것입니다.
진정 제자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시는 기도입니다.
당신과 성부께서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도록 지켜달라고 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사실 우리도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긴 합니다.
그런데 역시 거부감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가
획일적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양성이 살아있지만 당신의 삼위일체처럼
사랑으로 하나가 되길 바라십니다.
서로를 존중하기에 존중 받는 각자도 제멋대로 하거나
공동체를 뛰쳐나가지 않고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와 하나를 이룹니다.
또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이 실은 다름과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기에
개성을 지니지만 자기를 고집치 않아 사랑으로 공동체와 하나가 됩니다.
자기 고집은 사랑의 개성과 다릅니다.
자기 고집은 고립이거나 공동체 이탈입니다.
공동체에 속하지도 공동체와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공동체에서 이탈치 않고 속하면서 공동체와 하나를 이루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 안에서 살기에 세상의 악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 공동체에 속하는,
고도의 사랑을 사는 당신 제자들이 되라는 초대를 우리도 받는 오늘입니다.
(영적인 이리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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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사랑의 수다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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