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스라엘을 영도한 모세는 같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모세가 죄를 지었다지만 그 벌 치고는 너무 가혹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더 깊은 영성적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가 전혀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인간적으로나 세속적으로는 자기가 시작한 것 자기가 완성합니다.
씨를 뿌렸으면 추수까지 자기가 하고 애쓴 보람을 누리는 거지요.
인간적으로만 보면 이렇게 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니고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할 수 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씨를 뿌린 것, 곧 시작한 것이 모세가 아니기에
모세가 그 열매까지 맛볼 수 없고, 맛보려 해서도 안 됩니다.
제가 가끔 제 개인적으로도 보람을 느끼고 남에게 자랑도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제가 성북동 수도원에 나무를 심은 것이고 그 중에서도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짐승을 키우지 않고 나무를 키우는 기쁨을 생각게 되는데
짐승은 오래 살지 못하지만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 살고
특히 소나무와 느티나무 같은 나무는 계속 크게 자라서 그 보람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그 나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뿌듯하고
이거 내가 심은 거라고 자랑도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저는 그런 자신을 보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반성도 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도 나무는 자기가 아니라 후손을 위해 심는 거야 하거늘
영적으로는 더더욱 아무리 자기가 씨를 뿌렸다 하더라도
자기가 열매를 거두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씨조차 내가 뿌린 것이 아니기에 자기가 수확을 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이런 면에서 충분히 영적인 존재이기에 자기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담담히 자기역할을 마무리 지며
당부를 하는데 그중에서도 “힘과 용기를 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합니다.
자기가 같이 들어가지 않아도 가나안 사람을 보고 겁내거나 두려워 말고
오히려 힘과 용기를 내라는 거지요.
그런데 힘과 용기를 내라고 한다고 힘과 용기가 나나요?
힘과 용기가 나야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인데
힘과 용기가 어떻게 나느냐 그 얘기입니다.
힘과 용기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까?
힘과 용기를 내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힘과 용기가 나지 않는 경험을
자주 하는데 이것을 보면 힘과 용기가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웬만해서는 힘과 용기가 내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판사판일 경우 기를 쓰고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끌어낼 수 있고,
엄마의 사랑 간절한 부추김을 받으면 내 안에 남아있는 힘과 용기를
다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과 용기는 엄마가 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혼자 안 될 때 엄마가 옆에서 부추기고 부축해주면
내 안에 조금 남아있는 힘과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넘어졌을 때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고 일어날 의지도 없는데 옆에서 누가,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용기를 불어넣어주면 있는 힘을 다 내잖아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이의 부추김과 부축은 나의 남아있는 힘과 용기를
끌어내는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도 계시고,
힘과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고 부축하는 사랑하는 이웃도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힘과 용기를 내는 것은 다만 나의 몫임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따르는 듯 따르지 않는 나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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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사랑을 한다면 한 사람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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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하늘을 품는 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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