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종신서원을 하던 해 저는 하던 공부를 1년 또 쉬었습니다.
서원 전 제가 하고자 했던 체험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제가 하고픈 체험을 다 하고 서원을 하고자 했지만
그때 관구장님은 서원을 하고 체험을 하라고 저를 회유하였고,
그 회유에 넘어가 서원을 한 다음 체험기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체험은 당시 가장 가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삶을
제가 한 번 똑같이 살아보는 것이었고, 그렇게 체험들을 한 다음
그 중 하나를 택해 평생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장 노동자를 찾는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가 취직상담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저를 직원으로 써주지 않았습니다.
나이도 많은데다 얼굴이나 손이 곱고 너무 하얀 것이
도저히 험한 공장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취직을 못하다가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고 겨우 9만원을 받는,
나이키 가방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으로도 감지덕지하였는데 그것은
앞서 취직하려 하였던 금형이나 선반, 프레스 공장 사장들을 만나
악수를 하면 손가락 한 두 개씩 잘려나간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일을 하게 되면 그분들처럼 될 각오를 해야 했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취직 안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나이키 공장에 취직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크게 느낀 것,
같아지는 것은 낭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신학교 때 저는 몰로카이 섬에서 나환자를 위해 일하다
나병에 걸려 죽은 다미안 신부님의 전기를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자신이 나병환자가 아니기에
그들의 고통을 똑같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와 목욕을 하려고 뜨거운 물을 가지고 오다
실수로 뜨거운 물을 흘렸는데 발의 감각이 없었습니다.
“병이 나에게 덮치면 부활의 날에 주님께서 내게 새 몸을 주실 것이다”고 한
그였건만 막상 나병에 걸린 것을 알고는 놀라 그릇을 놓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내 그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자신을 세상의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하며 생을 마쳤지요.
사랑이란 같아지고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기 하지만
같아지고 하나 되는 것이 이렇게 같이 망가지는 것일 때에는
낭만이 아니라 엄혹한 고통의 현실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던, 아니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포옹하고
나병환자가 되신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
십자가의 주님과 같아지고픈 열망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생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1224년 십자가 현양 축일에
그는 마지막 소원을 이뤄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당신이 겪으신 십자가 위의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달라고,
그 고통을 감수하신 주님의 사랑을 똑같이 느끼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전기는 이때의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으로 채워짐으로써
그는 모든 마음의 괴로움을 견딜 준비가 되었고,
모든 육신적 고통을 참을 각오가 되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과 똑같이 오상을 받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은총이 아니라 일생을 닮고자 했던 열망의 열매이고,
마음과 몸의 모든 고통을 감수할 준비와 각오가 된 사람에게 주어진 거지요.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젊은 날 치기어린 저의 열망을 돌아보며
한 편, 부끄러워하면서도
다른 한 편, 지금은 그런 치기마저도 부족한 저를 더 부끄러워하며
프란치스코의 십자가 주님께 대한 그 열망을 우러릅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먹이시 옵소서
부해서 하느님을 모른다할까 하오며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며 하느님이름 욕되게
할까 두렵워 함이니이다.(잠언 30;8,9)저의 기도이며 대단하신 신부님 존경과사랑을 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