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모른다고 하는 자를
주님께서는 당신도 천사들 앞에서 모른다고 하시겠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네가 그러면 나도 그런다는,
치졸한 인간의 그런 쩨쩨한 마음보의 말씀일까요?
대전역을 내려서 서쪽 광장으로 나오다보면
모 대학을 알리는 광고판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며
“청소부 아줌마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입니다.”라고 자랑스러워하는데
그 대학 총학생회 회장인 아들이
그 대학의 환경미화원인 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총학생회장인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흔하지만
아들이 환경미화원인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보기 드물지요.
언제가 신문에서 본 아주 씁쓰레한 얘기.
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여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시골의 환경미화원이었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였기에
자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아들은 말했고,
아버지는 일생 자기 아들이 누구라고 얘기하지 않고 살았답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얘기.
다른 집 엄마는 젊고 잘 차려 입고 학교에 오는데
자기 엄마는 늙고 꼬지지하여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을 싫어하고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도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끄러워하여 부모의 자식임을 부정해도,
다시 말해 자식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부정해도,
그런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는 부모는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그 자식의 부모라고 세상에 얘기할 수 없지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배반한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것처럼
몰라서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하느님의 자녀라 생각지 않는 사람을
당신의 자녀라고 주님께서 억지 고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부 신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모습.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길거리에서도 자신을 신앙을 고백하는데
가톨릭 신자들 중에는 식사하면서 성호경도 당당히 바치지 못하고,
바치더라도 마치 죄인처럼 바칩니다.
수많은 나의 정체성 중에서 나는 어떤 정체성의 존재입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나의 으뜸가는 정체성이고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그것을 생각해보는 오늘입니다.
고백하지 않을때 불안, 돌이켜 믿음의 자녀임을 말 할때 오는
기쁨 과 평안함 주신 우리 주님 참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