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 독서는 즈카르야 예언서인데
여기서 하느님은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그러니까 엠마누엘 하느님이요 육화의 하느님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때 이미 육화의 하느님 곧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복음은 계속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분이라고,
그러니 예수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인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을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느끼며 살아갑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제 생각에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중 하나는 다른 데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생각지 않고
다른 어디 특별한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찾는 것을 실패할 때
우리는 여기서 찾는 노력을 더 하기보다
하느님은 다른 어디 특별한 곳에 계신다고 눈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지금 스쳐가는 바람결에도 계시고,
꽃에도 계시며 돌멩이에도 계시고 심지어 길바닥에 뒹구는
종이쪼가리에도 계신다고 프란치스칸들은 얘기하지 않습니까?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표가 못 되고 은총이 아닙니까?
매일 해가 떠오르니 우리는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지 않고
해가 십자가 모양을 할 때만 기적이라고, 하느님의 표징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해가 뜨는 데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인간이 한 것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하셨다는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진정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몰라 보기 때문인데
이 또한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엠마누엘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그러니까 관계 안에 계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형제를 밀어내어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 관계 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런 관계 안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사랑할 때만 보이고,
나와 같이 있는 형제가 나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할 때만 보이는데
나와 같지 않다고 나와 같이 있는 것을 거부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 안에 계실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제 기억이 정확하지 모르지만 <사막의 교부들>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수도원에 형제들 간에 사이가 너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유명한 수도승이 찾아 와서 이 수도원 형제들 중에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얘기를 하고 떠났고 그때부터 수도자들은 서로를 주님처럼
생각하고 사랑케 됐고 그래서 형제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았다지요.
우리도 지금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현재적으로 만나고 느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다.^♡^
(즐거움, 그 만족과 허무의 관계)
http://www.ofmkorea.org/38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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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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