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오늘의 이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풀어 얘기합니다.
일하고 들어온 종은 쉬지도 못하고 곧 바로 식탁을 준비해야 하고,
준비한 다음에는 시중까지 들어야 하며,
시중 든 다음에는 수고했다는 소리를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쓸모없는 종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정말 이런 것입니까?
이런 사이이고,
우리의 처지가 이런 처지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루카복음 12장은 오히려 주인이 종의 시중을 든다고 얘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이것도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호 시중들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우리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오히려 온갖 시중을 드신다는 표시입니다.
종들을 포악하게 다루고, 혹독하게 부려먹는 그런 주인이 아니라
엄마가 자식의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듯 시중드는 주인이십니다.
사랑의 자발적 낮춤인데 이런 낮춤에 우리가 종의 신분을 망각하고
종이 아닌 것처럼, 심지어 주인인 것처럼 망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의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실로 간이 붓다 못해 간댕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인 저를 봅니다.
내 좋을 대로 하고는 뒤처리는 다 하느님이 하라는 식이지요.
그 근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제 사랑이 큽니까, 당신 사랑이 큽니까?
당신 사랑이 크니 당신이 제 뒤치다꺼리를 하십시오. 이겁니다.
앞서 봤듯이 이것은 어머니와 자식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어머니라는 죄 때문에, 사랑하는 죄 때문에
어머니는 자식의 온갖 시중을 다 들고
어머니는 자식의 온갖 생떼를 다 들어줍니다.
자식은 엄마의 사랑이 더 큰 것을 잘 알고 믿기에
보고 싶으면서도 오고 싶어 하는 엄마를 오지 말라고 합니다.
먹을 거면서도 괜히 안 먹는다고 엄마를 애태웁니다.
엄마의 사랑을 쥐고 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뉘우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쥐고 흔들려듭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도 합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아쉬운 법이니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더 시중을 들라고 제멋대로 합니다.
엄마한테는 이러하지요.
그러나 어머니한테 그러면 아니 되지요.
철부지 어린이때는 그렇게 엄마한테 떼를 써도 되지만
그 사랑을 알 수 있는 어른이 되어서는 어머니께 효도를 드려야 하지요.
하느님한테는 그리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는 그러면 아니 되지요.
주인이신 분이 우리의 종이 되시어 시중드시는 그 사랑을 진정 안다면
그 사랑을 무시하지 말고 더 높이 받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감탄합니다.
“오 탄복하올 높음이며 경이로운 관대함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즉 자식을 돌보며 사랑하면서 부모님 사랑을 그나마 조금씩
깨달아지며 광대하신 하느님 사랑은 신비 이겠지요. 오늘도 은총
속에 살게해주신 하느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