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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오늘의 복음은 저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습니다.

 

 

지금 번역은 해와 달과 별에 표징이 나타난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옛날 복음은-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지만-마지막 날에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는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가 오지 않기를 정말로 바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때는 두 가지의 때입니다.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는 징벌의 날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오시는 날입니다.

 

 

비난非難과 비판批判이 있습니다.

둘 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비난은 그저 잘못을 지적할 뿐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비판은 저러해야 하는데 왜 이러했느냐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난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무책임하게 배설하는 것이라면

비판은 치유를 위한 수술, 건설을 위한 파괴입니다.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하지 건설적인 비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건설을 위해서 파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난은 그 사람을 비난하는데 비해

비판은 그 사람의 어떤 잘못을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비난은 어떤 사람을 훼손하고 거꾸러트리는 것이 목적이고

비판은 그 사람에게서 잘못을 벗겨내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자는 것과 사람을 살리자는 것의 차이입니다.

비판적 지지라는 말이 그 뜻입니다.

비판에는 이렇듯 고심이 배어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징벌도 비판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건설적 파괴라고 해야 할지, 파괴적 건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새로운 건설을 위한 파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저 우리를 죽여 버리고 싶어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시겠습니까?

 

절대 그러실 리 없으시지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파괴하시는

주님의 그 고뇌어린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파괴에서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파괴적 미움이 아니라 구속적인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인생이 끝장난 양 풀이 죽어 지내지 말고

오히려 “속량이 가까웠으니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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